광고닫기

'액땜'이란 없다

Los Angeles

2014.10.13 21:15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신승호 목사/USC찬양선교교회
불났던 집에서 장사하면 부자가 된다. 지나가는 상여를 보면 재수가 좋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도장을 파면 일이 잘된다. 사람들은 그런 얘길 농담처럼 하지만 실은 그걸 은근히 믿거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이 생기는 걸까. 불행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시도인가, 아니면 실제 믿을 만한 영적 원리인가.

새로 산 차를 애지중지하다가 접촉사고가 나면 상한 마음을 스스로 달래려 하는 말이 "액땜했다 생각하자" 다. 새 차를 멀쩡하게 타고다닐 순 없다는 듯이 들린다. 금슬 좋은 부부가 행복에 겨운 나머지 그 행복이 깨질 걱정마저 한다. 병 없이 건강한데도 언제 갑자기 암에 걸릴지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새집으로 이사 가서 목사님께 심방을 부탁하는데 축복을 원하는 마음과 함께 액(?)을 쫓겠다는 마음도 은근히 있다. 왜 사람들은 그런 불행한 일을 기대(?)하는 걸까.

국어사전은 '액'을 '모질고 사나운 운수'라고 풀이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불행이나 불운 겪을 가능성을 잠재의식 속에 늘 품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근본적으로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 맘속에 자리 잡고 있는 거다. 모종의 심판을 의식하기 때문에 '액땜'이란 걸 부인 못 한다.

양심의 거리낌 없이 사는 사람이 있을까. 법적으로 따진다면 당당할 수 있겠지만 도덕적으론 아무도 당당할 수 없다. 그게 누구나 갖는 기본적인 두려움이다. 평생을 선하고 정직하게 살기 원하지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기심, 정욕, 거짓, 탐심 등의 끊임없는 유혹에 잘 넘어가기 때문이다. 정직과 선의 기준에 어쩔 수 없이 미달하는 자신을 자각하면서 벌에 대한 인식을 어딘가에 품고 살아가는 게 우리 현실이다. 정도의 차이지, 누구나 실은 죄인의식이 있다.

예수를 믿기 전, 교회를 습관처럼 놀러다니던 시절엔 맘 한구석에 늘 어떤 불안함이 있었다. 주님을 만나 거듭나고 새로워지면서 그런 불안이 다 사라졌다. 이론이 아닌 실제다.

'액' 같은 것에 대한 두려움은 이젠 없다. 하나님 앞에 떳떳할 사람 아무도 없지만 신앙인이라면, 우리 위해 모든 벌을 대신 받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온갖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내야 한다. 그것이 실제적인 믿음이다.

자유를 누릴 특권을 갖고 있으면서도 행사하지 못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믿음을 바로 세우는 일부터 힘써야 한다. '죄인의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님 안에서 누리는 참 평안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액 자체를 주님이 다 짊어 지셨다. 우리에겐 더 이상 액이란 게 없다. 하나님께서 간혹 자녀를 징계하시는 것은 액이 아니라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잘못을 깨우치시고 더 온전케 만드시는 고마우신 배려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더 새로워지는 기회다.

[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