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뜨락은 그리 넓지가 않다.
나는 겨우내 이 빈 뜨락에서 서성거린다.
가을을 보내기도 하고 봄을 기다리기도 하는 삶의 터전이다.
언덕 위에 지은 집이라서 바다와 산이 함께 보인다.
멀리로는 라이온스 마운틴에서 베이커 마운틴까지 바라볼 수 있다.
작은 집치고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어 나의 무료한 시간을 함께 한다.
바닷가에 가까운 곳이어서 그런지, 질흙과 조약돌이 섞여서 굳은 땅이라서 집터로서는 기초가 튼튼한 편이다.
그러나 나무들이 자리기에는 힘든 척박한 땅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좋아하는 나무들을 어렵사리 구해다가 심어 놓았으니 걱정스러울 수 밖에.
땅을 쪼아내다시피 파고 거름흙을 한 트럭 사다가 부었지만, 나무들의 자연 환경을 바꾸어 주기는 쉽지가 않았다.
30년전 이민 짐 속에 묻혀 온 모과나무 씨를 싹 틔워 키워온 나무와, 콩나물같이 어린 묘목을 들여 왔거나 씨를 구해다가 파종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을 떠나온 나무들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스럽지 않은 나무들이지만, 가꾸어 온 세월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함께 하고 있으니 나무이기 전에 친구라서 하루에도 두 서너 번 마주 서 보는 나무들이다.
나를 따라와 고생하는구나 하는 미안함이 있지만 이 이역에선 그렇게나마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니 구원의 손길을 뻗칠 수 밖에. 이래저래 심어 놓은 고향 나무들이 십여 종을 헤아리게 한다.
배나무, 모과나무, 목련나무, 진달래, 소나무, 매화나무, 드룹나무, 머루와 다래나무,산사유, 오미자, 산사자, 복분자, 진백,더덕과 취나물까지 내 뜨락의 친구들.
그 중에서도 나의 관심을 끄는 수종은 진달래다.
생명력이 강인해서 이 곳 산지에서도 잘 자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라우스 마운틴 쯤에 진달래가 피어나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겨레들도 고향의 봄을 느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다.
얼마 전에 어느 신문 인터넷에서 청양에 있는 칠갑산 아래 안선생이란 분이 멸종 위기에 있는 하얀 진달래 번식에 성공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가을에 한국에 가면 씨를 받아오고 그 분을 만나서 그 기법을 배워 오리라 마음 먹고 있다.
나에겐 이들 나무들이 봄소식을 전해 준다.
이월 중순경에 매화가 꽃 빛을 드러내면 설레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나’라서 추운 바람 맞으면서도 나무의 곁은 떠나지 못한다.
보고 또 보고가 사람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한다.
겨울 속의 봄꽃, 그 짜릿한 내음을 맡는 순간 나도 봄이 된다.
봄의 신비가 새삼 새로워 지는 순간이다.
눈산을 바라보며 봄을 마주 보는 반가움이다.
추운 때 피어나는 꽃들은 개화 기간이 비교적 길다.
매화는 그런 속성 때문에 보름 가까이 피었다가 스러져 간다.
삼월초 쯤에는 진달래가 피고 그 뒤를 따라서 백목련이 핀다.
그리고 배꽃, 이 때엔 나도 바빠진다.
두고 온 땅에 이끌리듯 나무 곁을 떠나기가 아쉬워진다.
나무들 중에서 제일 부지런한 나무는 모과다.
겨울의 날씨가 훈훈만 해도 눈을 뜬다.
그리고 사월 초에 꽃이 핀다.
날씨와 토양에 따라서 열매가 맺기도 하는데 삼십년이 지나도록 나는 아직 그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다.
써리에 사는 P회장이 몇 해 전에 두개의 모과가 열렸다고 보여 준 일이 있는데, 해마다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나무에게도 낯선 곳이다.
꽃이 피는 계절이 저물어 가면 그 열매들이 자라는 모습을 살피느라 바빠진다.
매실은 몇 개나 맺었다, 배나무는 어떤가, 그리고 진달래는 씨를 키우고나 있는가, 하는 부질없음이다.
자연하지 못함을 알면서도 나무 곁으로 다가서니 나무인들 부끄러워 하지 않겠는가. 내년 봄을 생각하는 성급함 때문에 그리하고 있다.
다시 꽃을 보고 그 열매를 거두며 봄을 고마워 할 수 있는 날들이 영속되는 것이 아니니 오는 봄이 소중할 수 밖에. 봄은 자연의 축복이다.
오가는 이 없이 보내는 나날이라 해도 봄의 뜨락에선 외롭지가 않다.
나무들의 봄길 속에서 세월에 묻혀버린 나의 봄날을 되돌아 보기도 하고, 어쩌다가 찾아오는 지인(知人)에게 꽃 한 송이 들려줌도 지금의 나에겐 큰 기쁨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하여 장미를 나우 싶었다.
백 평도 채 안되는 정원 모퉁이에다가 백여 그루나 심었으니 이들이 다투어 피어날 때에는 좁은 공간이 부끄럽다.
안분지족을 모르는 과욕한 속내가 드러나는 것 같아 먼저 장미에게 미안하고,다음으로 땅 보기에 송구하고, 하늘 보기에 염치 없다.
나의 봄은 아니지만 나무들의 봄 이야기에 빠져드는 나를 어쩌지 못하여, 아니 그보다는 먼 나라에서의 외딴 봄을 달래 보려는 심정, 그래서 다시 삽과 호미를 든다.
그만 심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다시 오는 봄을 기다리기 위하여 나무를 심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하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그래도 나는 나무들이 씨를 맺는 한 봄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