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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견의 몽유도원도

Chicago

2004.05.11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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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견(安堅)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화가다.
본관은 지곡(池谷), 자는 가도(可度), 호는 현동자(玄洞子) 또는 주경(朱耕)이다.
세종 때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고, 문종과 단종을 거쳐 세조 때까지도 화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세종의 셋째 아들인 매죽헌(梅竹軒) 안평대군을 가까이 섬기면서 안평대군이 소장하고 있던고화(古畵)들을 섭렵함으로써 자신의 화풍을 이룩하는 토대로 삼았다.

‘몽유도원도’(사진)는 일본의 덴리(天理)대학 중앙도서관에 보관돼 있는데, 어떤 경로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세종 29년인 1447년 어느 날 꿈속에서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여행하고 거기서 본 바를 안견에게 설명해주고 그림으로 그리게 한 것이다.
안견은 이 그림을 3일 만에 완성했다.

‘몽유도원도’에는 도원의 경치를 그린 그림과 함께 안평대군의 발문, 그리고 안평대군의 주위에 있던 박팽년·최항·신숙주 등 당시의 쟁쟁한 인물 21명이 자필로 쓴 찬시도 함께 실려있다.

이런 점 때문에 ‘몽유도원도’는 회화 작품으로서 뿐만 아니라 서예 작품으로서, 또는 당시 안평대군을 둘러싼 중신들과의 관계를 알아볼 수 있는 사료로서도 큰 의미를 가진다.
두루마리 안쪽에는 첫머리에 ‘몽유도원도’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그 다음에는 폭 25㎝의 푸른색 비단 바탕에 여섯 행의 붉은 글씨가 쓰여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세상 어느 곳이 꿈꾼 도원인가(世間何處夢桃源)/은자의 옷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野服山冠尙宛然)/그림 그려 보아 오니 참으로 좋을씨고(著畵看來定好事)/여러 천년 전해지면 오죽 좋을까(自多千載擬相傳)/그림이 다 된 후 사흘째 정월 밤(後三日正月夜)/치지정에서 마침 종이가 있어(在致知亭因故竿)/한마디 적어 밝은 정취를 기리노라(有作淸之)’ 그림을 보면 화면의 왼쪽 아래에서부터 오른쪽 위로 꿈속에 나타났던 장면이 점층적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화면의 왼쪽은 현실세계가, 화면의 중간은 도원으로 들어가는 동굴과 험난한 길이, 오른쪽에는 복숭아꽃이 만발한 도원의 이상 세계가 그려져 있다.
왼편의 현실세계는 정면에서 보고 그렸으나 오른편의 도원 세계는 부감법(俯瞰法)을 구사하였다.

이 그림의 중심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도원의 경치를 보면 위쪽에 고드름처럼 매달린 바위가 이 곳이 동굴임을 상징하고 있다.
또 복숭아나무들과 대나무 숲에 둘어싸인 텅 빈 초가집들이 보이고, 영롱한 복사꽃 사이의 물가에 작은 빈 배가 매어 있다.
이런 장면들은 안평대군이 정유년 세종 29년에 꾸었던 꿈에 나타난 장면들을 기초로 한 것이다.

‘몽유도원도’는 왕자로서의 안평대군이 현실에서 겪어야 했던 고민들이 나타나 있다.
즉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면서 오히려 거기에서 오는 갈등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찰, 번민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 배어 있다.
안평대군이 경험한 황홀한 이상 세계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안견에게 그리게 한 그림이 ‘몽유도원도’인 것이다.
중국 동진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김영희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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