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여덟 나이에 자녀 교육을 위해 이민와 약사로 일하다 불혹을 넘긴 그가 돌연 의대에 가겠다고 했을 때 들었던 주위의 반응이다.
"아내는 2주동안 저랑 말도 안했어요. 4년을 떨어져 있어야 했고 혼자서 아들 둘을 키워야 하니 쉬운 결정이 아니었겠죠. 졸업 후 미국 의사 면허 시험에 붙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고."
뉴욕 플러싱의 이완수(62) 소아과 원장 이야기다. 한국에서 약대를 졸업하고 약사로 나름 편안히 살다 늦깎이 이민길에 오른후 미국 약사 면허 시험을 2년만에 취득한 뒤 뉴욕 맨해튼의 정신의학센터(Psychiatric Center)에서 일하던 때였다.
"주급은 꼬박꼬박 나왔지만 네식구 살기에는 너무 적었어요."
그의 도전은 우연한 곳에서 시작됐다. 함께 병동에 있던 그리스인 의사가 하루는 그에게 "너는 나이도 어려보이고 똑똑해 보이는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 지금이라도 의대를 가는게 어떠냐. 나도 엔지니어였는데 서른 셋에 의대에 갔다"라고 했다. 그는 그 때 이미 42세였지만 학창시절 꿈이 다시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고 한다.
도미니카공화국의 의대 등록금이 미국에 비해 5분의1 수준인데다 졸업 후 미국 면허 시험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된 그는 가족들 몰래 산페드로 데 마코리스의 UCE의대(Universidad Del Este)를 방문해 입학 사정관을 만났다.
"경희대 약대를 수석 입학하고 약사로 일했던 기록, 미국 약사 면허 취득 후 경력 등을 모두 보여줬죠. 빠르면 3년 안에도 공부를 마칠 수 있겠다는 답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 뒤부터 아내를 설득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저의 선택, 아내의 헌신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거에요."
4년간 아내와 두 아들이 살 수 있게끔 여기저기 돈을 끌어모아 재정 설비(?)를 한 뒤 그렇게 43세 늦깎이 의대 대학원생의 공부가 시작됐다. 모든 수업은 스패니시로 진행됐다.
"영어도 완벽하지 않았는데 스패니시로 수업을 들으려니 거의 처음 6개월~1년은 수업 후 스패니시 공부에 몰두해야 했어요. 학과 시험 준비는 스패니시로 달달 외우고, 미국 의사면허 시험은 영어로 공부했죠. 하루 24시간 중에 몇시간 자는 시간 빼고는 앉아서 공부만 했으니까요."
그 때 스패니시와 씨름한 덕분에 이완수 소아과는 환자의 3분의1이 라틴계일 정도로 타민족들에게도 입소문이 나있다.
3번에 걸친 미국 의사 면허 시험을 통과한 뒤 문제는 레지던트 자리를 구할 수 있느냐였다.
"졸업 당시 제 나이가 47세였지요. 늙다리를 레지던트로 안써주면 어쩌나 했는데 미국은 정말 고마운게 나이를 안보고 제 경력만을 보더라구요. 한국과 미국의 약사 자격증도 있으니 여러 곳에서 연락이 왔고, 뉴욕 인근 나소메디컬센터에서 레지던트를 시작했죠."
이 원장은 그 때를 회상하면 감격스러워 했다.
"제 이름 뒤에 MD 글자가 새겨진 하얀 의사 가운을 입었을 때, 고생한 4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나이 50에 레지던트 2년차를 달았을 때는 병원 직원들이 서프라이즈 파티를 열어줬다.
"레지던트 3년 후 가톨릭메디컬센터에서 일하며 지난 2002년 말에 개원을 했어요."
의학과는 전혀 무관한 보스턴대와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쌍둥이 두 아들도 아빠의 권유에 따라 의학대학원에 진학했고 현재 소아과와 가정의학과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다.
이 원장은 "우리의 앞날을 아무도 알 수 없듯이 내 안의 잠재력은 발휘해 봐야 그 한계를 알 수가 있겠죠. 그때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저도 없었을거에요. 요즘 경기가 안좋아 커리어 전환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어요. 물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꿈을 위한 도전에는 절대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젊은데도 도전을 주저하는 분들에게 제 이야기가 동기부여 역할을 한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