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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영화] '와일드'…모든 것을 잃은 그녀, 길 위에 서다

Los Angeles

2014.12.04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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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Wild)
감독: 장-마크 발레
출연: 리즈 위더스푼, 로라 던
장르: 드라마
등급: R


한 여자가 길 위에 섰다. 모든 것이 바닥이다. 헤로인에 중독됐고, 아무하고나 잠자리를 가졌다. 임신을 했지만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남편과는 갈라설 수밖에 없었다. 폭력적 알코올중독자였던 아버지로부터 그녀와 동생을 지켜주던 어머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 상실감은 몇 해가 지나도록 사라지질 않는다. 황폐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가 마음대로 몸을 굴리며 쾌락에 탐닉한 것은, 일종의 자해이자 도피다.

그런 그녀가 길 위에 선 것이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배낭 하나만 짊어졌다. 하이킹 경험이라곤 전무하지만, 무언가 돌파구를 찾고자,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고자, 괴로움을 떨쳐버리고자 모하비 사막부터 워싱턴주 끝까지1100마일에 이르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걷기 시작한다.

쉽지 않다. 당연하다. 모든 게 고통이다. 발은 짓무르고 발톱은 덜렁이다 빠지고 온몸은 멍투성이에 배낭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다리는 푹푹 꺾이기 일쑤다. 휴대용 버너 하나 제대로 만지지 못해 모래처럼 차가운 음식을 입에 우겨넣어야 하고, 불쑥 불쑥 나타나는 송충이나 뱀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여러 번이다. 발에 맞지 않는 등산화, 더위와의 사투, 지분거리는 남자들을 피하는 일도 90일간의 하이킹 동안 지겹게 반복된다.

그러나 그 여정 또한 치유의 시간이자 성장의 길이었다. 극한의 고행과 철저한 외로움 안에서, 그녀는 외면하고 있던 자신의 아픔을 비로소 직면하고 훌훌 털어내며 그 다음 단계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3개월의 하이킹 끝 캐나다 국경 인근 '신들의 다리'라 불리는 웅장한 다리 앞에 선 그녀는, 90여 일 전 멕시코 국경 인근에서 불안하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잰걸음을 옮기던 그녀와는 완전히 딴 사람이다.

영화 '와일드(Wild)'는 실존인물이기도 한 그녀, 셰릴 스트레이드의 이야기다. 모든 것은 그녀가 직접 겪고 솔직하게 써 내려간 책 '와일드'에 적힌 내용 그대로다. 배우 리즈 위더스푼은 이 책을 읽자마자 완전히 매료돼 주연은 물론 직접 제작에까지 나서, 영화를 완성시켰다. 리즈 위더스푼은 자신이 책을 읽으며 느꼈을 법한 감정을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달하려는 듯 보인다.

한 여자가 그저 주구장창 길을 걸을 뿐인 단순하기 그지없는 영화가 오만가지 다양한 감정의 진폭을 전해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리즈 위더스푼의 힘있는 연기 덕임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그만큼 그녀는 셰릴 스트레이드에게 완전히 동화돼, 골 깊은 감정의 파고와 서서히 변화되어가는 힐링의 과정을 동물적이고도 섬세하게 스크린 위에 펼쳐보였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뙤약볕 내리쬐는 사막 먼지 바닥을 뒹구는 그녀의 모습은, 보는 이에게마저 그 시간을 함께하는 듯한 고통을 전한다. 중간중간 플래시백으로 보이는 그녀의 자기파괴적 과거는 관객을 함께 감정의 나락으로 끌어내리기도, 뼈아픈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도 한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즐거웠던 시간을 회상하는 장면이나 그 시절의 아픔을 견디다 못해 서럽게 울어 젖히는 모습이 스크린을 채울 때면 그 생생한 감정의 파고가 그대로 객석을 덮어버리는 듯한 커다란 진정성을 펼쳐보이기도 한다. 계속돼서 반복돼 들려오는 사이먼&가펑클의 노래도 영화가 던져오는 그 울림에 힘을 실어준다.

가끔은 영화 속 캐릭터인 셰릴 스트레이드 말고, 리즈 위더스푼 그녀 자신이 보이기도 한다.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지만 '깜찍 발랄한 금발 미녀'의 이미지에 갇혀 자유로운 작품활동을 하지 못했을 지 모를 그녀가, 모든 것을 내던지고 쏟아부어 완전히 새롭게 변신하고 성장하고자 '와일드'란 영화를 택한 절박함과 간절함이 느껴져서다. 리즈 위더스푼의 그 거칠고 용감한 도전만으로도, 이 영화 '와일드'는 충분히 그 가치를 평가받을 만한 작품이다.

이경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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