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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이순신과 녹둔도〈상>

New York

2014.12.04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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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수 / J&S 라선-추진 Inc 대표
'황금의 삼각주'라고 불리는 나선(나진-선봉)경제자유무역지대가 향후 동북아시대에는 최대의 물류 및 관광.자원개발단지가 될 것임을 확신하는 필자는 나선을 자주 방문하는 사업가다.

그런데 시 정부로부터 새로이 관광지를 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방문해 본 결과 다름 아닌 이순신 장군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유적지였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대부분의 한인들이 그곳의 역사를 접할 기회가 없고 또 잘 알지 못하기에 이 글을 기고하기로 하였다. 마침 러시아산 석탄이 나진항을 통해 포항에 도착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면서 이 글을 올려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이순신 장군은 42세이던 1587년 조선의 북방 변방지대였던 조산(造山)에 만호로 부임하게 된다. 당시 그 지역 주민들은 두만강 지역에 흩어져 있던 외적(여진족)들의 끊임없는 침략과 약탈 행위로 인해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이 살았다. 변방의 정세가 복잡해지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조산 만호로 파견하고 두만강 하구에 있던 녹둔도(鹿屯島) 둔전관을 겸하게 하였다.

조산은 현재 함경북도 나선(羅先.북한 표기로는 라선)시 20동 12리의 하나인데 두만강 연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서쪽은 부포리 남쪽은 굴포리 북쪽은 두만강동(마지막 기차역인 두만강역이 있음) 동쪽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의 원동지역과 접해 있다.

원래는 경흥군 지역으로 조산진성 모래가 날려와 생긴 산을 낀 마을이라 하여 조산리라고 하였다. 후에 웅기군 조산리가 되었다가 1981년 웅기군이 선봉군으로 개칭되면서 선봉군 조산리로 되었고 1993년에 나진-선봉시 선봉군 조산리에서 2000년 나진-선봉시가 나선시로 개칭되면서 현재는 나선시 조산리로 되어 있다.

만호로 부임한 이순신은 병사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외적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한 싸움 준비를 빈틈없이 갖추도록 하였다. 1589년 어느 해보다도 풍년이 들었던 그 해 둔전의 곡식들이 잘 여물어 군사들이 모두 벼베기를 나간 틈을 타서 외적들이 무리지어 침입하였다.

그때 녹둔도에는 이순신과 병사 10여명밖에 없었는데 이순신은 이 봉우리의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고 기묘한 전법으로 적들을 격퇴하고 도망치는 적을 추적하여 포로가 되었던 우리측 군민 100여 명을 구출하고 약탈해 갔던 많은 재물들을 되찾아왔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다리를 크게 다쳤는데 군사들이 알면 사기가 떨어질까 봐 칼로 살을 베고 화살을 뽑아 버렸다 한다.

이 싸움에서 적들이 얼마나 혼이 났는지 후에 여기로 쳐들어 오려다가 이 봉우리에 갈배재를 세워 놓은 것을 보고는 새 화살이 가득한 것으로 알고 싸워 볼 생각은커녕 겁에 질려 도망치고 이후로는 감히 침입할 엄두도 못냈다고 한다.

이렇게 조산 만호로 부임하여 2년 만에 변방을 튼튼히 한 이순신의 업적을 기념하여 이곳 백성들은 슬흔봉이라 하던 이 봉우리를 승정봉이라 바꿔 불렀으며 남녀노소 모두가 돌을 날라 탑을 쌓았는데 그 높이가 사람의 키 한 길 반이 더 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순신의 5대손 이민상이 관북절도사로 있으면서 탑을 보고 장군이 나라에 남긴 공적에 비해 너무 초라하다 하여 1762년에 승전비를 세웠다. 비의 높이는 1.8미터 가로 0.8미터 세로 0.27미터 갓돌은 가로 1.2미터 세로 1미터 높이 0.6미터로 균형이 잘 잡히고 정중성이 갖춰져 있다.

화강석 돌을 쪼아 만든 것이지만 마치 부드러운 나무를 깎아 만든 것처럼 비면이 매우 고르며 갓돌은 섬세하면서도 듬직하고 무게 있게 보이도록 하였다. 비각은 합각식 처마지붕이며 기둥은 배부름식흘림기둥이고 천정은 궁륭식천정으로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양식과 수법 건축미를 구현한 것으로 규모는 작으나 우리 민족의 지혜와 재능 건축예술 발전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의 앞면에는 승전비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이순신 장군이 적은 군사로 적들을 물리쳐 큰 승리를 하였으며 임진왜란 시 기묘한 전법으로 승리해 나라에 크게 공헌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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