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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셔 플레이스]'알랑미'를 아시나요

Los Angeles

2004.08.09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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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필 논설실장
“아직 맛을 못봐서 그러누나. 백날 굶어보렴. 안남미가 그대로 남아있을까! 그들도 처음 며칠은 이 밥에 배탈을 얻어 십여일이나 설사까지 하고도 할 수 없이 먹었다. 인숙이와 선비를 돌아 보아보니 두 사람도 배가 고파서 창문에…”

〈강경애의 장편소설 인간문제에서〉

강경애는 1940년대 초 서른셋의 나이로 요절한 작가. 소설은 일제의 암울한 시절 농민들과 도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그려낸 그의 대표작이다. 사회주의 성향의 작가여서 그동안 빛을 못보다가 최근들어 재조명되고 있는 문인이다.

기름 진 우리 쌀은 일제의 군량미로 빼앗기고 대신 안남미로 끼니를 떼웠으니 당시엔 밥맛이 죽을 맛이었던 모양이다.

안남미는 해방 이후 50~60년대에도 한국인의 삶 중 한 부분을 차지했다. 아마 50대 이상 나이드신 분들에겐 ‘알랑미’가 더 친숙할게다. 안남미가 발음이 어렵자 이를 안량미로 부르다가 나중엔 알량미, 안랑미, 그러다가 알랑미로 굳어진 것이다.

이 ‘알랑미’가 대량 보급된 건 5·16 직후. 쌀이 부족하자 정부가 수입해 와 배급을 줬다. 그나마 됫박으로…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안남미가 한국인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줬다.

처음엔 안남미가 미군의 구호식량인 줄 알았다. “양키 것은 쌀도 엄청 크네.” 길죽하게 생긴 게 처음 보는 쌀이어서 대부분 눈이 휘둥그래졌다. 하지만 밥을 지어 먹으니 그게 아니었다. 소설 속의 안남미와 어쩌면 그리 똑같을까. 숟가락에 밥을 얹어놓고 재채기를 한번 한면 흰 알갱이가 사방으로 흩어져 민망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찰기가 전혀 없고 푸석푸석해서 맛없는 쌀의 대명사가 돼 버렸다.

도대체 안남이 어디일까. 월남을 일컫는 말인 줄은 한참 후에 알았다. 한자인 안남을 베트남 말로 발음하다 보니 월남이 됐다는 것이다.

요즘 안남미 얘기를 하면 “세상이 바뀐지가 언제인데…” 빈축을 사기 십상이다. 이른바 ‘롱 그레인’(Long Grain)… 이젠 건강식 아닌가.

고급식당의 볶음밥엔 거의 예외없이 안남미가 나온다. 후 불면 날아갈듯한 생김새며… 여기에 향료를 첨가해 남국의 톡 쏘는 맛이라고 선전을 해 대면 문전성시를 이룬다. 지방질이 거의 없으니 비만 방지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고. 월남국수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안남미로 만든 것이다.

굶주림을 못이겨 마지못해 먹었던 안남미. 어느새 미식가들의 기호식품으로 떠올랐으니 세월이 주는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올해는 유엔이 정한 ‘쌀의 해’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넘는 30억의 주식이다. 유엔이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딱 세 글자. ‘쌀은 생명이다’(Rice Is Life). 삶과 문화 그 자체로 자리잡은 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자는 뜻이 담겨져 있는 구호다.

50~60년대 한국인들에겐 안남미가 생명이 아니었을까. 베트남 정부가 헐값에 쌀을 주지 않았다면… 아마 보릿고개 넘기기가 수월치 않았을게다.

20년전 남중국해에서 96명의 생명을 구해 베트남 커뮤니티로 부터 ‘이 시대의 참 인간’이란 찬사를 듣고 있는 전제용 선장. 하지만 안남미는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을 굶주림에서 살려냈을까.

8일 열린 전선장 환영대회를 보며 “고맙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쌀로 맺어진 두 커뮤니티… 유엔의 슬로건 마냥 바로 생명으로 맺어진 사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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