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의 피아노 음악이 매혹적인 것은 가장 탁월한 부분 속에서도 파국이 들이닥치고 그 자신의 나약함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소멸을 향해 바쳐진 끊임없는 생각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음은 슈만이 쓴 일기의 한 구절이다. '누군가 나를 검은 베일과 휘장으로 둘러싸서 파묻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상태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슈만은 자신의 작품 '야상곡'에 원래 '시체들의 판타지'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의 음악은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대목에서조차 고통과 그 고통이 야기한 죽음의 충동과 맞닿아 있다.
그의 걸작 환상소곡집(OP.12)을 들어본다. 호프만 소설에서 따온 시적인 제목이 전곡에 붙어 있다. 석양 갈망 왜? 변덕스러움 밤에 우화 꿈에 노래의 종말 이렇게 총 8곡이다. 서정적인 첫 곡 '석양'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헤어진다. 석양의 멜로디는 우리를 유폐시키고 고립시킨다. 우리는 스스로의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둘째 곡 '갈망'은 독일 낭만주의자 특유의 성향이다. 이 곡은 마치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는 것과 같다. '다시 돌아오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간 시간의 개념이 없는 시간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간이여 돌아오라.'
세 번째 곡 '왜?'에서 우리는 얼떨떨한 채 낯선 상대를 자신의 상처를 핥는 동물을 불시에 만나게 된다. 넷째 곡 '변덕스러움'에 접어들면 재귀(再歸)의 상태 곧 스스로에게 돌아가는 체험을 한다. 여기서는 결코 대상이 주체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대상은 자기 자신하고만 대화한다. 그 자신의 행동의 대상 그 자신의 소멸의 반영이다. 이어 매우 빠른 패시지로 달려가는 다섯 번째곡 '밤에'에 도달한다.
휴식의 밤에 오히려 고통은 다가오고 스스로를 모색하고 멀어지고 속내를 털어놓고 회의하고 헌신하고 격분하고 회상하고 사라져 간다. 고통은 지금 여기 현재의 것이다. 고통은 지나간 것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라고 불리는 곧 다가올 장래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을 드러낸다. 여섯 번째 곡은 '우화'. 지극히 조용하다가 곧 지극히 활발해지기를 반복하는 이 곡에서 슈만은 거의 주제를 전개시키지 않는다. 변용은 더더욱 일어나지 않는다. 슈만은 남들과 다른 논리 파편의 논리를 따라 악상을 전개시킨다. 되풀이되는 고통 우울과 광기와 우유부단한 감정 분출 탓으로 규모를 갖춘 형식적 전개를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일곱 번째 곡 '꿈에' 대목이다. 여기서 핵심은 '조각'이다. 조각나 흩어진 마음의 시간. 자아의 파편 기분의 지속적인 유출로 정신은 분열되고 해체된다. 슈만은 음악을 조각내 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여덟 번째이자 끝 곡 '노래의 종말'에 당도한다. 우리는 보통 음악을 들을 때 어떤 감정을 '느끼고' 그런 감정적인 상태 '속에' 처한다. 하지만 슈만의 음악은 이런 범위를 벗어난다. 고통에는 형상이 없으므로. 그 음악은 신체에 고통을 안겨준다. 그런데 그 고통이 다른 어떤 몸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다시금 경험하지만 '노래의 종말'을 듣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과 헤어진다.
이상 두 회에 걸쳐 슈만의 피아노곡을 감상했다. 먼저 앨런 소칼의 유명한 '지적 사기'를 거론해야겠다. 과학자 소칼은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읽는 학술잡지에 과학용어를 짜깁기해서 매우 '있어 보이는' 철학적 논문을 게재했고 큰 반향을 얻었다. 그리고 소칼은 폭로한다. 사실 그 논문은 철학자들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 만든 내용 없는 난센스 글이었다고. 물론 소칼과 같은 동기 즉 누군가를 테스트하려는 목적으로 슈만 피아노곡 감상기를 쓴 것은 아니다. 내가 쓴 글은 프랑스 음악이론가이자 정신분석학자 미셸 슈나이더의 책 '슈만 내면의 풍경'을 대단히 과감하게 짜깁기한 것이다. 슈나이더는 슈만의 음악이 자아망실을 경험하게 한다는 관점에 서 있다. 그 망실은 슈만의 생의 고통에서 출발한다. 정신분열과 자살충동이 배경이다. 그 관점이 흥미로워서 군데군데 문장을 따와 특정한 곡의 감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내놓고 한 표절이다.
때로 몽롱한 문장이 의외의 확장성을 안겨준다. 지난주에 이야기한 '프랑스 음악이론가'는 미셸 슈나이더다. 그의 책 전체가 난독의 숲이지만 '아 좋다' 한마디에서 멈췄던 감흥을 마냥 증폭시키는 효과를 안겨준다. 그리고 그 감흥이 지적 아니 문화적 사기는 아니려니 한다.
음악은 언어와 다른 영역의 기호체계다. 우리들 삶의 고통은 끊임없이 수다스럽게 말-언어를 불러오는데 음악은 그 고통을 침묵시키는 데 기여한다. 언제나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슈만 피아노곡의 특성은 그 침묵이 위로와 전혀 다른 성격이라는 데 있다. 슈만의 피아노는 산산이 분열되는 정신의 한 정점 고통 자체를 현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