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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맥 세상] 서초동 강씨, '국제시장' 덕수

Los Angeles

2015.01.14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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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논설위원·기획특집부장
새해 들어서자마자 뉴스가 줄잇는다. 급기야 이런 사건까지 터지는구나, 싶다. 그 좋다는 서울 강남 서초동에 사는 48세 가장이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한 사건 말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앞날이 막막해서'가 범행 동기의 전부다.

드러난 개요는 이렇다. 범인 강씨는 명문대를 나온 엘리트였다. 외국계 정보통신 회사에서 임원까지 일하다 퇴직했다. 여기저기 재취업을 했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마음은 다급했지만 더 이상 취직할 데가 없었다.

집을 담보로 5억원을 빌렸다. 아내에게 매달 400만원씩 생활비를 주고, 본인은 고시원으로 출근(?)했다. 낮시간은 온라인 주식투자에 매달렸다. 수억 원을 날렸다. 초조했다. 벌이는 없고, 돈은 매달 필요하고, 가진 것이라곤 아파트 한 채. 목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듯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급기야 가족들의 불행한 미래를 용인할 수 없다는 마음이었을까,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발동해 잔인한 범행을 저질렀다.

경찰 관계자는 "한때 잘 살다가 실직한 다음에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 보이지 않고 생활은 점점 추락해가는 것을 느끼다가 결국은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견디지 못하고 범행을 저지른 것 같다"고 말했다.

강씨의 집은 시가 11억원(약 120만 달러)에 달하는 강남의 아파트였다. 5억원을 빌렸다지만 여전히 6억원의 자산이 남았다. 아내 통장에 3억원이 있다는 말도 했다. 이 정도면 한국에서 부자 축에 든다고 할 수 있는데도 강씨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이 사건을 접하면서 요즘 히트치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을 떠올렸다. 영화 속 주인공 덕수는 평생 '덕수'라는 인격체로 살지 못한다. 그는 '가장'이라는 허명(虛名)의 짐을 지고 평생을 살 수밖에 없었던 한국 현대사 속 서민을 대변한다.

6.25 흥남철수, 서독광부 파송, 월남 파병 등을 거치며 덕수는 오로지 '가장'의 인생을 산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생각한 그 어느 늙은 날, 가족들이 한쪽에 모여 왁자지껄 즐겁게 놀 때 덕수는 다른 방으로 혼자 들어가 독백한다.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서초동 강씨의 범행에 대해선 여러 분석이 나온다. 강남에서 잘 나가던 사람이 추락하면서 느끼는 '상대적 빈곤'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것도 이유가 됐겠지만 '가장의 무게'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쪽에 더 수긍이 간다.

'흥남철수' 출신 덕수는 온갖 밑바닥 인생을 다 이겨내며 가장의 무게를 견뎌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그러나 서초동 강씨는 그 젊은 나이에 가장의 무게에 눌려 압사하고 말았다.

덕수는 '절대적 빈곤' 속에서도 힘든 인생을 헤쳐냈고 그 결실로 아름다운 노년을 맞는다. 반면 서초동 강씨는 좋은 조건의 삶을 살았지만 '상대적 빈곤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불행을 자초했다.

영국의 언어심리학자 대니얼 네틀 박사는 책 '행복의 심리학'에서 대규모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많은 사람들을 7~12년에 걸쳐 행복심리지수를 조사했다. 그 기간에 소득이 늘고 줄어든 경우, 생활이안정되거나 격변을 겪은 경우 등 다양했다.

결론은 처음과 나중의 행복지수가 비슷하더라는 것이다. 살면서 겪는 갖가지 인생사가 행.불행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네틀 박사는 "행복과 불행은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서초동 강씨가 영화 '국제시장'에서 덕수를 만나 보았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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