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햇(Blackhat)'은 사이버 범죄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날고 긴다는 해커들이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동안 사이버 범죄를 다룬 영화들이 대부분 착한 편과 나쁜 편이 각각 컴퓨터 앞에 앉아 두뇌싸움을 벌이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쪽이었다면, '블랙햇(Blackhat)'은 해킹을 통해 국제적 범죄조직이 움직이고 음모를 펼쳐 나가는 과정을 큰 스케일로 그린다.
'히트' '마이애미 바이스' '콜래트럴' '퍼블릭 에너미'등을 연출해 온 액션계의 거장 마이클 만 감독의 작품답게 곳곳에서 시원스레 폭탄이 터지고 박진감 넘치는 총격전이 일어난다. 그 사이사이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복잡하고도 입이 떡벌어질 정도로 기상천외한 해커들의 꼬리를 무는 싸움이 이어진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범죄와 이를 소탕하기위한 노력이 어지러이 뒤엉키는 것이 '블랙햇'이 취한 구성이다.
영화는 시스템을 해킹당한 중국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어나는 폭발 사고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동일범으로 추정되는 해커들은 미국 금융시장마저 혼란에 빠뜨린다. 이에 중국과 미국이 손을 잡는다. 중국 최고의 브레인 요원인 첸(왕리홍)과 그의 여동생(탕웨이)이 나서 FBI와 공조 수사를 펼쳐 해커들을 소탕하는 작전에 돌입한 것.
첸은 MIT 시절 친구이자 천재적 해커이지만 지금은 감옥 신세를 지고 있는 닉 해서웨이(크리스 헴스워스)도 끌어 들여 팀을 꾸린다. 미국과 중국, 홍콩, 자카르타 등을 바쁘게 오가며 수사망을 좁혀가던 이들은 상대 해커들의 음모가 예상보다 크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소탕하기 위해 몸을 던진다. 하지만 그럴수록 약이 오른 적들은 더욱 과격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수사팀을 교란한다.
'블랙햇'의 소재가 된 해킹은 온라인상에서 일어나는 범죄들이 현실세계 속 사건사고들만큼의 심각성과 무게로 다가오는 이 시대에, 지극히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임이 분명하다. 마이클 만 감독은 실제로 유명 해커와 전 FBI 사이버 범죄 수사관 등의 조언을 받아 영화 속 사소한 부분들까지 세세히 챙겼다. 예를 들면, 영화에 등장하는 컴퓨터 화면 속 해킹 코드들은 실제 해커들이 봐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정확하고도 전문적인 용어와 명령어들이다.
반면 그 많은 공을 들여 만들어 낸 해킹의 과학적 배경을 과연 얼마나 많은 관객들이 이해할 것인가 하는 의문은, 이 부분의 효용가치에 대한 근본적 의구심을 들게 한다. 영화가 가장 재미있어지는 부분이 전형적 액션 장면이란 점도 딜레마다. 물고 물리며 머리를 쓰는 해킹 과정 보다는 동남아의 이국적 풍경 속에서 주인공들이 총격을 벌이고 숨가뿐 도주를 해대는 장면들이 훨씬 박진감 넘치고 흥미롭다. 영화의 정체성 자체가 흔들리는 부분이다.
최근 김태용 감독과 결혼해 한국인들에게 더욱 호감도를 높인 탕웨이의 모습을 만나는 것은 너무도 반갑다. 입에 잘 붙지 않았을 영어 연기인데도 대사 처리가 어색하지 않고 감정 표현도 깊다. 크리스 헴스워스와의 로맨스 연기도 제법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