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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에서의 생존자

Chicago

2004.09.14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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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음기법으로 만들어진 음열음악은 무조음악 중에서도 특히 듣기 어려운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한 음 한 음이 미리 정해진 수학적 규칙에 의해 자리를 잡으므로 아름다운 멜로디라든가 귀에 익을만한 주제같은 것들이 있을 수 없어, 사전 지식 없이 듣는 이들에게 '이 무슨 의미 없는 음의 나열이란 말인가'하는 의문만을 줄 뿐인 음열음악.
그런 의미에서 12음기법의 창시자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 1874∼1951)는 대중적으로 엄청난 사랑을 받는 종류의 작곡가는 아닐 뿐더러 때로 감성과 뜨거운 피가 부족한 음악가라는 의심마저 받곤 한다.

그런데 아직 그의 12음 기법이 완성되기 전, 조성의 입김이 조금 남아 있는 시기의 음악을 들어 보면 그것이 오해와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초기 현악 육중주곡 <정화된 밤 verklaerte nacht> 같은 곡들은 달빛 속에 흔들리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그 어느 조성음악보다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의 후기 작품들 중 하나인 <바르샤바에서의 생존자 a survivor from warsaw> 역시, 부분적으로 12음기법으로 작곡됐음에도 불구하고,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다.
제목이 왜 영어로 지어졌느냐 하면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망명지 미국에서 그가 작곡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태인 혈통을 가진 오스트리아 작곡가였고 나치를 피해 일찌감치 미국으로 옮겼는데,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았던 미국의 문화적 토양에서 그 난해한 음악성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쓸쓸히 만년을 보냈다.

이 곡은 '내가 직접 전해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썼다'는 주석이 달린, 내레이터와 관현악을 위한 작품으로, 2차대전 중 유태인 학살을 회상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유태인인 화자는 가족들과 강제로 떨어져 남자들만의 수용소에 갇혀 있다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과거 어느 날 나치 장교가 그와 동료들에게 가스실로 행군시키던 중 그와 일행들은 총 개머리판으로 무자비하게 얻어맞고 발로 걷어차인다.
유태인들은 공포와 무력감에 울부짖고 화자는 시체들 사이에 내동댕이처져 신음한다.
나치 장교는 포로들에게 가스실에 넣을 숫자를 세기 위한 점호를 명령하고,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재촉하는 번호를 세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넷… 그런데 처음엔 천천히, 침울한 목소리로 시작된 번호가 점점 빨라지고 소리도 커지더니, 어느 덧 '달리는 야생마들의 발굽소리처럼' 강렬해져 결국 유태인들의 옛 기도문인 '슈마 이스라엘'의 합창이 시작되는 게 아닌가!
거대한 폭력 앞에 무기력하게 대응하던 인간이 서서히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해 결국 성난 파도처럼 강렬하게 폭발시키는 모습을 쇤베르크는 무조라는 차갑고 인간의 감정이 실리기 어려운 재료를 사용해 실로 감동스럽게 표현해내고 있다.

얼마 전 신앙의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 극적 탈북한 한 기독교인의 증언을 들었다.
현재 북한의 한 수용소에는 6천여명의 기독교인들이 강제노동을 하며 죽음과도 같은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데, 용광로에서 그와 함께 노역하던 동료들 모두 강한 화력에 머리카락을 전부 잃고 뼈마디가 녹아내려 평균 신장 120∼130cm 정도로 키가 줄어든 채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어가며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남쪽에서는 미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북한 인권법 제정안에 대해 한국의 국회의원 26인이 내정간섭이라며 이의를 제기하는 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뜨거운 피로 세상을 정의롭게 바꾸겠다며 나선 젊은 그들. 북한의 인권을 외면한 입술로 한국의 인권을 얘기할 자격이 그들에게는 과연 있는지? 감성과 뜨거운 피가 부족하다는 쇤베르크도 이토록 강렬한 언어로 인권을 이야기하건만.
황시내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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