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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영화 '케이크'…'스타'가 아닌 '배우' 제니퍼 애니스턴을 만나다

Los Angeles

2015.01.23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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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단언해보건데, 제니퍼 애니스턴의 필모그래피는 이 영화 '케이크(Cake)' 전과 후로 나뉘게 될 게 분명하다. 그간 늘 예쁘고 코믹한 비슷비슷한 역만 하며 이미지를 소비해왔던 제니퍼 애니스턴이지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다르다. 비로소 그에게 '스타'가 아닌 '배우'란 수식어를 줘도 어색하지 않을 만한 대표작이 나왔다 해도 과장이 아니다. 최근 발표된 제 87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후보에서 그녀의 이름이 빠진 것이 올해 최고의 이변으로 꼽힐 정도니, 영화계 관계자들의 생각도 그리 다르지만은 않은 듯하다. 다행히 골든글로브와 배우조합상은 그녀의 이름을 여우주연상 후보에 빼놓지 않고 올린 바 있다.

'케이크'에 등장하는 제니퍼 애니스턴의 비주얼은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얼굴은 상처투성이에 늘 잠옷 같은 헐렁한 옷만 입고 유령처럼 움직인다. 만성 허리 통증으로 더듬더듬 걷는 것도 버거울 정도다. 어디서든 눕기 바쁘고 시도 때도 없이 진통제를 입 속에 털어 넣는다. 성격은 왜 이리 까탈스러운지. 그룹 치료 모임에 나가서도 가시 돋친 말만 하기 일쑤고, 아쿠아 세라피를 하는 동안에도 불평불만뿐이다. 영화 속 제니퍼 애니스턴이 연기하는 클레어는 바라보는 것 자체가 고통인, 그런 여자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그녀가 궁금하다. 분명 사연 혹은 이유가 있으리란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왜 이렇게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걸지, 얼굴의 상처는 왜 그런 것인지도 궁금해진다. 돌봐주는 간병인 말고는 왜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그런데도 형편은 어떻게 저렇게 넉넉한지 점점 그녀에게 관심이 간다. 연민도 생긴다. 까칠하고 괴팍하지만, 알고 보면 마음만은 따뜻한 사람이란 점이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간병인 실바나가 친구들 앞에서 곤경을 당하는 걸 멋지게 구해주는 상황이 대표적이다.

최근 자살했다는 그룹 치료 모임 멤버 니나(애나 캔드릭)의 죽음에 집착하는 심리에도 서서히 관심이 간다. 죽은 니나 생각에 사로잡혀, 그녀의 영혼과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면 그 집까지 몰래 찾아가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왜 그런 걸까. 영화는 차분히 한 겹씩 그 비밀의 더께를 벗긴다. 클레어가 겪었던 아픔과 그녀를 잠식하고 있던 고통의 비밀들이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벗겨지면서, 관객들은 더 가까이 그리고 진하게 클레어의 감정에 다가가고 공감하게 된다. 극 후반으로 가도록 특별한 사건이 없음에도, 클레어에게 이입해 눈물을 흘리게 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극적인 변화는 없지만, 영화 마지막 자동차의 의자를 힘차게 들어올리는 클레어의 모습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응원과 박수를 보내게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한 여성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연출의 솜씨는 준수하지만 전체적 이야기를 촘촘하게 엮어내기에는 허술한 감이 없지 않다. 특히 후반부에 클레어가 니나의 집을 본격적으로 찾아 들어가면서 시작되는 '힐링'의 과정은, 인과관계가 뚜렷하지 않아 감동이 삭감됐다. 하지만 제니퍼 애니스턴의 빛나는 연기가 이 모든 것을 커버하고도 남는다. 불면증이 겹친 만성 통증을 겪고 있는 40대 무렵 고학력 중산층 여성의 일상을 이보다 더 사실감 있게 그려낼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아주 진지하고 감성적인 정극 연기지만, 그동안 코미디 영역에서 쌓아 온 유쾌한 유머 감각과 절묘한 타이밍 감각이 똑같은 상황도 더 맛깔나고 밉지 않게 살려내는 신공으로 작용했다. 심리치료사와 한마디도 지지않고 언쟁을 벌이는 장면이나 의사를 교묘히 구슬려 진통제를 더 타내려 애를 쓰는 장면 등이 대표적이다.

제니퍼 애니스턴은 이 영화의 제작까지 맡았다. 마흔다섯의 나이에 할리우드라는 정글에서 진정한 배우로 거듭나기 위해 던진 승부수로서는 아주 대담하고도 성공적인 시도였다. 이젠 관객들이 그녀의 이 멋진 도전에 응답해줄 때다.

이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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