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이전의 중국은 자유중국이던 대만이었으며, 지척의 중공과는 서로 존재도 인정하지 않았었다. 그 시절 중국 민간항공이 한국에 불시착했을 때, 나라 안은 온통 외계인이 찾아 온 것처럼 법석이었다. 의식적으로는 외면해도 힘의 균형이나 지형학 상으로도 어쩔 수없이 마음속으로 관심을 갖고 지내온 사이였을 것이다.
수교가 되고 한국기업들이 인건비가 싼 중국으로 하청 주고 아예 그곳에다가 공장을 설립하다보니 이제 청도 같은 도시는 밀려오는 한국인들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도 있다.
한국의 한 친구는 고구려 유적지가 있는 근교 골프장에서 라운딩 하면서, 여긴 우리 땅인데 하는 욕심이 들더라고 했다. 전부터 그런 한인들의 내면을 읽어 내기라고 한 듯, 2백만 조선족을 포함, 55개의 소수민족을 관장하는 중국 관리들은 한인들을 몹시 경계한다고 들었다.
필자는 심적으로 한국인 심정이고 보니, 중국이 한반도통일을 대비하여 고구려사 문제에 쐐기박으려는 시점에 떠난 중국여행이고 보니 마음이 가볍지 만은 않았다.
9월의 북경은 아직 무더위가 복병처럼 잠복 중이었다. 수도이며 직활시인 북경은 일년 중 맑게 개인 날씨가 얼마 되지 않는다. 스모그와 안개가 덮쳐있는 천안문광장과 자금성, 만리장성을 2박 3일 동안 열심히 걸었다. 음식문화가 대단한 한국은 위장 튼튼한 이들이 살기 좋은 나라라면 중국은 다리 튼튼해야 즐거운 나라였다. 차와 케이블카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넓은 나라 중국여행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아이고 다리 아파!"였다. 별이 4개인 호텔에서 아침에 칫솔질하다가 보니 피가 섞여 나오는 줄 알았다. 밤새 정지되었던 수돗물 빛깔이었다. 어차피 중국에서는 4대 국보 중 하나인 오차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출근시간 자전거 물결은 장관이었다. 나름의 질서를 만들며 택시까지 붉은 색깔인 그사이를 물처럼 흐른다. 자다 그냥 나온 듯, 옷차림에 신경 쓰지 않는 자전거 행렬이 번잡한 거리에서도 느긋하고 유유(悠悠)롭다. 차는 사람과 자전거를, 자전거와 사람은 차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서로 멈추지 않고 피해 가는 재주는 그들이 즐기는 서커스에서 유래된 것 같다.
양귀비와 진시황제, 삼장법사로 유명한 서안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탈 때만 해도 조선족 처녀 안내원은 한시간 연착쯤은 각오해야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만 4번을 갈아탄 비행기가 모두 제시간에 뜨고 내렸다. 올림픽을 앞에 두고 하루가 다르게 변모한다는 중국은 만만디 정신을 걷어내는 전국민적인 결심인 듯 하다.
넓은 땅에 산재한 조형물들과 성(城), 무덤들이 중국의 관광자원이었다. 그것들은 사람 목숨을 담보로 무자비한 인력을 동원하여 크기에 중점을 두고 만들어졌다. 진시황의 병마용, 흙으로 만든 군졸과 말의 정교함에도 놀라지만 그 옛날에도 위험한 첨병으로 소수민족들을 세워 놓은 데에서 한족의 속내가 보인다. 물론 그들은 몽고, 만주족 등으로부터 침공을 받아 나라를 빼앗긴 상처 때문에 북경 만리장성과 서안 성벽 등이 쌓여졌다. 모든 성벽 위로 차가 다닐 정도로 간격이 넓고 높이도 상당한데도 성밖 둘레는 폭이 50m 되는 도랑을 만들어 적의 침공을 막았다.
산수가 빼어난 계림은 계수나무가 숲을 이룬 곳이란 뜻이다. 한 밤중 도시로 들어서는데 오토바이 한 대가 불이 켜진 체 넘어져있고 옆에는 시체가 신문지에 가려진 체 누워 있었다. 차창으로 죽은 자를 보면서도 우리 일행은 배고팠다. 유적지들이 수많은 죽음 위에 세워진 것을 알고 난 뒤에 생기는 죽음불감증인가 보다
계림 리강의 산수화폭은 신선도처럼 절경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물이 오염되어가고 있었다. 관광객을 태우고 달리는 정기선의 식당 조리실과 변소의 밑 처리장은 동시에 그 강으로 통한다. 동방의 베니스라는 소주는 호수로 이루어진 도시였다. 그러나 물은 모두 썩어가고 있었다. 공무원복장인 남자가 배를 저으면 여자는 떠다니는 쓰레기를 매미채로 건져냈다. 이태백이 달을 건지려다 빠졌다는 항주의 서호는 당대 시인이던 백락천과 시인이며 시장이던 소동파 시절부터 지금까지 호수를 철저히 보호한 덕분에 깨끗하고 아름답다.
한국에서 경제대란이 일어나던 그해 여름 파리와 로마의 거리는 한국 젊은이들이 데모하듯 몰려다녔는데 만리장성에도 상해, 계림의 산정호수에도, 라스베가스 쇼를 방불케 하는 항주의 극장에도 한인 관광객이 다수였다. 소주의 실크공장을 견학 갔을 때였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던 여인이 따로 모아둔 번데기 봉지를 꺼내더니 한국말로 소곤거렸다. "천 원!"
관광객이 가는 도시마다 발 마사지가 성행했는데 20세 전후의 한족 마사지사들은 손님 중 대부분이 한국사람이라고 숫제 한국말로 설명했다. 어딜 가도 한국 돈이 인기 있었다.
샹하이 홍커우공원에는 윤봉길의사 흉상과 아담한 기념관이 있었다. 그가 일본 관리들을 향하여 도시락폭탄투척을 하는 장면을 그 당시 러시아사람이 찍었다는 흑백영화를 보았다. 25세의 윤의사가 "부모에 대한 사랑보다, 처자에 대한 사랑보다, 조국에 대한 사랑을 택한다"는 어머니와 처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는 순간 목이 메이어 왔다. 마영로의 협소한 임시정부 건물은 양국이 공동 투자하여 잘 다듬었는데도 김구 선생의 침실 등은 너무 초라했다. 그때 임시정부의 재정 지원 2/3이상이 미국이민 1세들이 사탕수수밭과 위들리 다누바 농장에서 벌어들인 달러였다는 사실도 더 좀 부각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북한 김정일위원장이 천지개벽이라고 놀란 샹하이는 정말 대단했다. 구도시 외탄에서 황포강 건너 보이는 포동 개발구는 88빌딩 등 새로 건설된 최첨단 건물들로 이루어진, 중국의 힘이며 무한대 가능성을 담은 신천지였다.
머리 나쁜 정치인은 베이징에서 사회주의 정치나 하고, 첨단 두뇌들은 샹하이에 모여 자본주의 경제를 지향한다는, 중국은 덩샤오핑(鄧小平)의 정신을 계승하여 실리를 택하고 있었다.
중국인들이 외형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마오쩌둥(毛澤東), 두 번째가 덩샤오핑, 그 다음이 저우언라이(周恩來)수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키가 150센티메터 정도의 덩샤오핑은 13억 인민들이 마음속으로 가장 사랑하며 고마워하는 정치인이다. 안내원 조선족 3세는 한마디로 덩을 이렇게 소개했다."여러 선생님과 저를 만나게 해준 분이 바로 덩샤오핑 선생님입니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마오쩌둥을 보좌하면서도 덩은 말했다. "먹을 것을 가진 자가 결국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 덩샤오핑의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으로 오늘날 중국 경제는 현기증 나는 속도로 성장해왔다. 빌게이츠 표현으로도 샹하이는 빛보다 빠른 변화였다.
아직 중국인들은 한류를 즐기며 한국이 앞서가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국토가 한국의 44배, 제대로 측정이 안 되는 엄청난 인구, 그 노동력으로 무섭게 세계 선두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중국의 급진적 산업화가 주변국 환경파괴를 하고있다는 생각에 이르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 장면이 떠올라, 섬짓한 느낌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태극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