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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트릿지의 겨울나그네

Chicago

2004.10.26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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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황시내<작곡가>
  지난 주까지만 해도 타는 듯 붉게 물들어 있던 나무들이 소리없이 잎을 떨어뜨려, 오늘 무심코 바라본 창 밖은 앙상한 가지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제 곧 기나긴 겨울이 시작되는 것이겠지요.
아직은 온기가 조금 남아있는 가을 밤 이안 보스트릿지의 독창회에 다녀왔습니다.
영국 출신의 보스트릿지는 39세의 테너로, 옥스포드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지성파 성악가랍니다.
오늘의 프로그램은 슈베르트의 연가곡집 <겨울나그네> 전곡이었어요. 전에 들어본 그의 음성이 왠지 제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테너 페터 쉬라이어의 그것을 연상시켜 그동안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으나, 이제 곧 겨울인 데 <겨울나그네> 한 번, 하는 심정으로 음악회장을 찾았지요.
그의 노래는 그러나 기대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젊기 때문일까요, 그는 무척 감정이 풍부한 편이었고, 그 감정을 큰 과장 없이 연주에 불어넣을 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통 들어왔던 나이 든 대가들의 관조의 빛을 띤 <겨울나그네> 와 대조적으로 그의 연주는 청춘을 회상하는 담담함 보다는 이 순간 기쁨과 슬픔을 생생히 느끼는 젊은이의 독백을 듣는 듯한 느낌을 객석에 앉아있는 제게 전해주었어요. 연가곡집 중 제가 좋아하는 부분들- <홍수> 에서의 ‘풀들이 다시 자라기 시작할 때, 따뜻한 바람이 불고 눈이 녹을 때’라든가 <냇물 위에서> 의 ‘너의 바닥에 나는 날카로운 돌로 내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새긴다’ 등 천천히 꿈꾸는 듯, 고백하는 듯한 부분-의 해석은 제가 지향하는 바와 달라 아쉬웠지만, 대신 빠르고 격정적인 곡들에서는 격동하는 청춘의 고뇌와 불안감을 무척 잘 표현한다고 느껴졌습니다.

 그의 <동결> 이나 <폭풍치는 아침> 을 들으신다면 동의하실 거예요.유명한 <봄꿈> 은 의외일 정도로 빠른 템포로 연주됐습니다.
‘새들이 노래하고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들판을 꿈에서 보았으나 깨어난 후의 현실은 어둡고 차갑기만 하다’는 내용의 이 노래 중 그는 꿈을 그리는 부분을 특히 빠르게 불렀는 데, 아, 꿈이 이렇게 빨리 그려지면 안되는 데, 하는 조바심과 함께 어쩌면 그가 ‘꿈이란 이처럼 덧없이 지나가 버리는 것’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 이 곡을 이렇게도 빨리 불러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답니다.
그도 또 저도 아직은 젊지만 ‘꿈이란 덧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씩은 알기 시작할 나이가 아니던가요? 오늘 가장 훌륭히 연주된 곡들은 아마 <고독> 과 <흰 머리카락> 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고독> 의 ‘아, 대기는 이렇게도 고요하고 세상은 이토록 밝은 데!’ 하는 부분이 특히 아름다왔는 데, 피아노 반주의 트레몰로와 보스트릿지의 탄식이 너무나 적절히 어우러져 조금이라도 고독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트레몰로와도 같은 가슴의 떨림을 느끼게 할 것만 같았습니다.
<흰 머리카락> 에서는 그의 감정이입이 돋보였지요. 듣는 이에게까지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그러나 곧 눈이 녹아버려 나의 머리카락은 다시 검은 색으로’ 하는 가사를 들으면서 제 머리가 흰 색에서 검은 색으로 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면 과장일까요.
긴 팔과 긴 다리를 피곤한 듯 늘어뜨리고 특유의 애수어린 눈빛으로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던 보스트릿지의 연주를 듣고 음악회장을 나서는 데 갑자기 싸늘한 바람이 코트 깃을 스치고 가로수들의 앙상한 가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곧 겨울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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