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고향 부산에 살고 있는 여동생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올해 설날에는 형제들이 오랜만에 다 한번 모여보자는 제안이었다. 아버지 팔순 생신 행사도 당겨 함께 하자는 거였다.
우리 네 형제는 멀리 떨어져 산다. 부산, 서울, 중국 칭다오, 미국 LA 그렇다. 한번 모이는 게 쉽지 않다. 게다가 딸린 자식들까지 빠짐없이 모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지금까지 식구들이 죄다 모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 누군가는 어떤 이유로 꼭 빠졌다. 이번에도 서울에 사는 동생이 대학 시험 준비로 바쁜 '고3' 아들을 남겨둬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나머지 형제들이 '예외 없다'고 압박했다. 그래서 진짜 '다' 모였다. 처음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도 한국행을 망설였다. 할 일이 지천이었다. 가족이 한번 나가자면 돈은 또 오죽 많이 드나. 이 핑계 저 핑계 대자니 휴가 낼 형편이 안 됐다. 그렇지만 이게 마지막이 될지 어찌 아나 싶은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고향서 닷새를 보내고 돌아왔다. 지금 심정은? 너무너무 잘 했다, 스스로 칭찬을 듬뿍 해주고 있다.
우리는 보통 떨어져 사는 부모, 형제, 자매를 거의 잊고 산다. 그냥 한 지붕 아래 있는 가족이 모두인 것으로 안다. 멀리 있는 가족을 가끔 생각하지만 그저 희미한 이미지로만 떠오를 뿐이다.
아마도 미국에 살고 있는 많은 1세 이민자들도 비슷한 느낌을 공유하고 있지 않을까. 고국에, 타주에 가족들이 있어도 여건이 안 된다며 차일피일 하다가 십수년 가족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다.
이번 고국 여행은 짧은 일정이었지만 강렬했다. 특히 가족에 대한 느낌이 그렇다. 가족은 에너지요, 힐링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저 함께 있기만 해도 좋은, 아무리 티격태격해도 금세 풀어질 수 있는 혈연의 정,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지는 못해도 서로 기댈 수 있다는 느낌, 그런 것이 서로 에너지가 되고 힐링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실상은 가족이 무너지는, 무너진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흩어지고, 지리적으로도 여기저기 떨어져 살게 되고, 얼굴 보고 손잡아보는 것보다는 그저 전화 한 통, 카톡 교환으로 만족하는 세상이다.
그러다보니 가족의 눈빛, 목소리, 흰 머리칼, 주름살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어찌 전화 목소리 듣는 것과 손 잡아보는 것이 같을까. 그럼에도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사는 게 흔한 모습이다.
가족이 아니라 '웬수'가 된 관계도 있다. 아예 가족이 없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관계가 무너졌다면? 만나서 손잡으면 다시 세울 수도 있다. 가족이 없다면? '가족처럼'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들면 좋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가족만큼 중요한 것도 없는데 가족을 너무 잊고 사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결코 잘 사는 방식이 아닌 것 같다. 이웃 민족인 라티노들을 보면 꼭 우리네 옛적 오손도손 했던 가족애를 떠올리게 한다. 공원을 뒤덮는 라티노들의 모임을 보면 가족이 주는 에너지를 느낀다. 가난하지만 그들의 얼굴엔 우리보다 웃음이 더 많이 돈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진다 해도, 사람이 느끼는 행복의 임계점도 따라서 높아질까. 아닐 것 같다. 행복은 잊었던 것, 소홀했던 것, 작은 것 그런 데 숨어 있을 것 같다.
걸출한 신학자이자 영성가인 현경 교수(유니언 신학대)가 쓴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라는 책 제목이 생각난다. '결국은 가족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로 바꿔 읽어 보자. 그러면 아마도 내가 '구원'해 줄 누군가가 떠오르지 않을까.
# [진맥 세상] 이원영 시사칼럼-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