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언론개혁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청산법 등을 폐지하거나 개정하거나 입법하려는 이른바 4대 개혁입법 문제를 두고 노무현정부 및 그 지지세력과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보수세력 사이에 마치 사생결단이라도 낼 것 같은 치열한 대립이 벌어지고 있다.
박정희 정권 이후의 군사정부 때는 말할 것 없고 김영삼.김대중 두 민간정부 아래서도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4대법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노무현 정부에 와서 이 문제들이 심각하게 부각되고 중요한 정치현안으로 되었는가.
익히 알다시피 우리 민족사회는 일본제국주의의 강제지배에서 해방되면서 바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따라서 지난 20세기 후반기 전체를 민족분단시대로서 보냈으며 지금도 분단은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4대 개혁입법의 대상 중 과거사 청산 문제의 일부인 친일파 청산문제를 제외한 다른 문제들 즉 국가보안법이나 언론법이나 사립학교법이나 민간인 학살문제 등은 모두 불행했던 20세기 후반기 민족분단시대의 산물이다.
민족분단시대의 산물이란 말은 분단시대적 상식이나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조성되고 또 유지된 상황들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진 법이요 사건들이란 말이다.
국가보안법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이 그것은 민족의 다른 한쪽을 '국가참칭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전형적인 민족분단시대의 법이다. 민족의 다른 한쪽을 적으로 인식하는 민족관과 역사관과 세계관을 근거로 하여 북녘뿐만 아니라 남녘 내부에서 일어나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부문의 문제까지를 처단하던 시대가 곧 20세기 후반기의 우리 민족사회를 지배한 불행한 시대로서의 분단시대였다.
그 때문에 그 같은 분단시대의 산물은 군사독재 분단시대정권은 말할 것 없고 민간 분단시대정권에서도 해결되거나 청산될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 그런데 민족분단시대 20세기의 마지막 정부였던 김대중정부 때 남북 사이에 6.15 공동선언이 이루어짐으로써 민족문제.대북문제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남북 대결의 민족사를 화해와 협력의 역사로 바꾸어놓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민족문제.대북문제를 분단시대식 방법 즉 대결과 항쟁으로만 가져갈 것이 아니라 평화통일 지향시대의 방법 즉 화해와 협력의 방법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구체적으로 자리 잡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김대중정권은 6.15 공동선언을 생산했다는 점에서는 21세기적 정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선 김영삼 정권이 군사독재정권과의 야합으로 성립된 한편 김대중정권은 5.16 군사쿠데타의 핵심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세력과의 연합에 의해 성립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는 20세기적 정권이라 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 두 20세기적 민간정권 아래서는 4대 개혁입법 문제 같은 것이 구체적으로 부각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6.15 공동선언은 물론 김대중정부의 업적이지만 그 노선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시대적 역사적 책무는 노무현정권의 몫이 되었다. 왜냐하면 노무현정권은 앞선 양김 정권과 달리 군사독재세력과의 야합이나 연합 없이 성립된 정권이기 때문이다.
4대 개혁입법의 대상들은 모두 20세기 후반기 분단시대의 산물이며 따라서 21세기의 평화통일시대에는 어차피 맞지 않는 상황을 근거로 한 법률들이다. 그 때문에 민족사의 21세기적 전진을 위해서는 기어이 청산되어야 법이요 상황일 수밖에 없다. 민족분단시대에 맞추었던 상황이나 법률로써 평화통일시대를 이끌어가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4대 개혁입법 문제를 두고 벌어진 지금의 상황도 현실에 밀착된 짧은 눈으로만 보면 심각한 대립과 혼선 그리고 국론분열로 보일수도 있다. 그러나 긴 역사의 눈으로 보면 하나의 시대를 넘기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한 때의 소용돌이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