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서면 자그마한 공원이 하나 있다. 이른 아침이면 이 공원을 산책하는 이웃들이 꽤 많다. 그런데 지난 6개월 동안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크게 줄었다. 시설을 업그레이드 한다고 빙~둘러 철책(왼쪽 사진)을 치고 공사를 벌였기 때문이다. 흉측하게 서있는 철책 옆으로 산책하는 기분은 그리 상쾌하지 않았다. 공사가 길어지면서 부자연스러웠던 철책은 어느새 익숙한 풍경이 되었고 별로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날처럼 산책을 나갔다가 내 눈을 의심했다. 철책이 싹 없어진 것이다(오른쪽 사진). 오프닝 행사를 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어제까지 있었던 철책, 그거 하나 없어졌을 뿐인데 느낌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달랐다. 탁 트인 느낌, 무엇인가 없던 것이 새로 창조된 느낌, 똑같은 공간인데 훨씬 확장된 느낌…. 글로 묘사하기 어려운 무척 좋은 감정이 솟구쳤다.
산책 나온 사람들도 다 비슷한 느낌이었는지 예외 없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선뜻 말을 건네며 "펜스 없애니까 너무 좋지 않아요?" 하는 말들이 곳곳에서 들렸다. 평소 때는 낯선 사람들과 스쳐지나며 '굿모닝' 하는 정도였는데 이 날엔 무려 세 사람과 명함까지 주고 받는 깨알 대화를 나눴다. 없어진 펜스가 소통의 봇물을 이루게 한 것이다.
사람들이 체조하는 몸동작에도 흥이 실린다. 수개월 동안 밟아보지 못하던 펜스 안쪽의 잔디를 걸으며 사람들은 장벽이 있다가 없어진 기쁨을 만끽했다. 갇힌 것이 열리고, 막힌 것이 뚫리는 소통과 해방, 자유의 감정이 그날 작은 공원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냈다.
물리적으로는 공원에서 펜스 하나 없어졌을 뿐인데 그 전과 후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됐다. 펜스가 있을 땐 잘 몰랐는데 없애고 보니 장벽을 걷어내는 것이 그렇게 좋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됐다. 제거된 철책으로 공간은 한층 넓어졌고 공원에 노니는 사람들의 동작은 더 커졌다. 확 트인 풍경은 이전에는 가질 수 없었던 상상력을 자극했다. 아마 사람들의 꿈과 희망도 변화되지 않았을까.
이번 작은 '철책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살면서 부닥치는 수많은 장벽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얼마나 많은 장벽들이 가로놓여 있는가. 직장에서는, 교회에서는, 그리고 가족 간에는 또 어떤가.
이뿐이랴. 내 스스로 넘지 못해 도전을 훼방하는 마음의 장벽도 있을 것이요, 인간과 자연의 하나됨을 방해하는 인공과 물질문명이라는 장벽도 있다. 어떠한 형태이건 간에 장벽은 불통을 부르고 지속되면 병이 생긴다. 그래서 한의학에서는 불통즉통(不通卽痛)이라고 했다. 그런 불통의 장벽이 있다면 그것을 걷어냈을 때 다가올 영혼의 고양, 비전의 확장, 마음의 평화를 그려보자.
집 앞 작은 공원에서 펜스 하나 없어진 '소형 사건'이 이렇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데 70년을 이어온 조국 분단의 장벽이 스러지는 '대형 사건'이 발생한다면 거기서 분출되는 에너지와 행복감은 얼마나 대단할까.
한반도를 분단하는 큰 장벽이 없어지면 남과 북에서 생겨난 작은 장벽들은 저절로 없어지거나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김대중.김정일 남북 정상이 평양에서 역사적인 악수를 나누고 통일 로드맵을 담은 6.15선언을 발표하면서 한반도에 화평의 기운이 넘실댔던 게 불과 15년 전이다. 거꾸로 되돌아간 지금의 현실이 참담할 따름이다.
남이나 북이나 펜스에 갇힌 채 옹졸하고 강퍅한 심성만 키우지 말고 장벽을 걷어냈을 때 발현될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상상해보라. 제발.
# [진맥 세상] 이원영 시사칼럼-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