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는 뉴욕.워싱턴DC와 더불어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됐던 지역이다. 필라델피아는 해외 독립운동의 요람이며 첫 수도로서 19세기 초까지는 미국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워싱턴DC에서 의사로 활동하던 서재필은 1896~1898년 잠시 귀국해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창립 등의 활동을 벌인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서 인쇄.문구업체를 운영하면서 성공한 사업가로서 활동 기반을 닦았다.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재필은 이승만.정한경 등과 더불어 미 동부 지역의 3.1운동이라 할 수 있는 '제1차 한국회의'를 개최했다. 이어 '대한민국통신부'를 설립해 미국 언론과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선전 활동을 펼쳤다.
한국의 식민지 실상 전달 '독립선언서' 낭독, 극대화 ◆제1차 한국회의 개최 장소(당시 리틀극장.1714 딜렌시플레이스)=1919년 4월 '제1차 한국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가 열린 곳인 리틀극장은 현재 소극장인 '플레이앤플레이어스(Play and Players)'가 들어서 있다. 하지만 극장 오른쪽에 '1919년 4월 14~16일 독립지사들이 이곳에 모여서 제1차 한국회의를 열어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선포했다'는 현판이 새겨져 있어 당시 뜨거웠던 독립운동의 현장임을 짐작할 수 있다.
미주에서 처음으로 3.1운동에 대한 한인들의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제1차 한국회의는 일제의 불법적인 식민통치와 식민지 한국의 실상을 알리고 3.1운동으로 나타난 한국의 독립과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의 열망을 전 미국사회에 전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집회가 끝난 후 150여 명의 참석자들은 리틀극장에서부터 시내 한복판에 있는 독립기념관까지 행진을 한 뒤 한국에서 발표했던 '독립선언서'를 낭독해 선전 효과를 극대화했다고 한다. 이 대회에는 한인은 물론 미국인도 참가했다.
현재 리틀극장의 원형은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다. '플레이앤플레이어스' 극장으로 바뀐 뒤 2001년 서재필기념재단은 건물 벽면에 제1차 한국회의 개최지임을 알리는 동판을 부착했다. 2009년 4월 서재필기념재단은 제1차 한국회의 개최 90주년을 맞아 이곳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고 독립기념관까지 시가행진을 하기도 했다.
영문 월간지 '한국평론' 발간 일제 식민통치, 만행 규탄 ◆대한민국통신부(1524 체스트넛스트리트)=서재필은 제1차 한국회의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지속적으로 선전하기 위한 방편으로 1919년 4월 말 대한민국통신부를 설립했다. 대한민국통신부의 주요 활동으로는 월간 영문출판물인 '한국평론(Korea Review)' 발간을 꼽을 수 있다. 또 한국 관련 여러 영문 책자를 출판해 미국 곳곳에 배포 서재필을 중심으로 각종 집회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고 일제의 불법 식민통치의 만행을 규탄했다. 그러나 통신부의 활동은 서재필이 해 오던 인쇄.출판사업이 어려워지면서 한국평론 1922년 7월호 발간을 끝으로 중단됐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대한민국통신부는 3.1운동 이후 미주 내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선전기구로 평가받고 있다.
후배와 인쇄·문구점 사업 구국운동 뛰어든 후 폐업 ◆필립제이손상회(1537 체스트넛스트리트)=대한민국통신부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해 있다. 원형은 그대로 보존돼 있지만 현재 1층에는 '리버티 트래블'이라는 여행사가 입점해 있다. 필립 제이손은 서재필의 영문이름으로 서재필을 거꾸로 '필재서'를 만든 다음 '필'을 '필립(Philip)'으로 '재서'를 '제이손(Jasohn)'으로 음역한 것이다. 한국의 자주와 민권을 위해 계몽운동을 펼치던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 온 직후 잠시 의학 관련 업무에 종사하지만 이내 그만두고 1904년 펜실베이니아주 커먼웰스에 있는 윌크스베리에서 해리힐만아카데미 재학 시절 1년 후배이던 해롤드 디머(Harold Deemer)와 인쇄.문구업체인 '디머앤제이손상회(Deemer and Jaisohn)'를 설립했다.
1905년 '디머앤제이손상회'는 필라델피아에 분점을 열었는데 디머는 윌크스베리 본점을 관리하고 서재필은 이 분점을 맡아 1913년까지 디머와 동업했다. 1914년 서재필은 단독으로 필라델피아 시내에서 가장 번잡한 곳에 '필립제이손상회(Philip Jaisohn & Company)'를 설립하고 사업이 번창하자 필라델피아 시내 두 곳(1907 레이스스트리트.4901스푸르스스트리트)에 분점을 개설했다.
사업이 한창 번창할 때 그는 종업원 50명을 쓰는 대형 사업체로까지 성장시켰다. 하지만 독립운동에 뛰어들면서 사업에 집중하지 못한 데다 경기 또한 계속 침체되면서 경영이 어려워져 결국 1924년 이 사업을 중단했다. 생계 유지가 곤란해진 서재필은 1926년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의학 공부를 더 한 후 의사로 활동했다.
서재필은 광복 후인 1947년 미 군정 최고고문 자격으로 49년 만에 고국에 돌아갔고 1948년 초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서재필 박사 대통령 추대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 시민으로 남겠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이승만 대통령 당선 후 초대 정부가 세워지자 철수하는 미 군정을 따라 미국으로 돌아왔다. 1950년 6.25전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서재필은 1951년 1월 5일 필라델피아 인근의 한 병원에서 87세의 생을 마감했다. 한국 정부는 1977년 1월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