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탈북동포 여성 S를 알게 되었습니다. 40대 중반 나이에 미혼이더군요. 허드렛일을 하면서 힘겹지만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탈북한 지 10년 정도 되었고, 미국에 들어온 것은 6년 전쯤이라고 합니다.
미국에 오기 전에는 중국에서 3년을 떠돌고, 태국 수용소에서 3년을 보내며 갖은 고생을 다 겪었다고 합니다. 한국으로 간다고 했으면 수용소에서 좀 더 빨리 벗어날 수 있었겠지만 미국을 택했기에 오래 걸렸다고 합니다.
한국행을 택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더니 한국에 정착한 탈북동포들의 곤궁한 삶을 익히 들어서 알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꿈에 그리던 미국 땅을 밟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브로커를 통해 북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냈지만 그것도 중간에 떼먹히기 일쑤였습니다. 아는 사람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미국땅에서 '북한출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모진 의지를 요구했을 것입니다. S는 "탈북 과정에서 고통스러웠지만 미국에서 살아남는 건 더 힘들다"고 털어놓을 정도였습니다. 동부쪽으로 행선지를 택했던 탈북 출신 두 사람은 미국생활이 힘들어 자살했다는 소식도 들었다고 합니다.
LA쪽에 30~40명 정도, 미 전역에 100여 명 정도의 탈북동포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들이 미국생활에 정착하도록 체계적으로 돕는 단체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북한출신'이라는 딱지를 달고 생존경쟁이 치열한 미국땅에서 살아남는 게 얼마나 힘들까,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아직도 북한 사투리만 들려도 불편한 시선을 던지는 한인들이 있을 정도이니까 말입니다.
그런 악조건이지만 S의 미래는 밝을 것 같습니다. 온갖 어려움을 겪어온 내공이라고 할까요, 그런 강인함이 있습니다. 게다가 '아바이, 아바이' 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출신 지역도 당당히 밝힙니다. 집주인은 그의 딱한 사정도 그렇지만 붙임성에 반해 월세를 반만 받는다고 합니다. 밤낮으로 토막일을 하면서도 짬을 내 학교에 다니며 영어공부를 합니다. 북한에서도 배고픔을 면하려 일찌감치 장사에 눈을 떴고 남들보다 돈도 더 잘 벌었습니다. 수완이 뛰어났던 그는 더 큰물에서 놀겠다는 꿈을 안고 국경을 넘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S에게 작은 선물이 안겨졌습니다. 신문을 읽으며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고 싶었지만(그는 북에서 교사를 지낸 인텔리다) 구독료가 부담이었던 차에 어느 독지가가 선뜻 1년치 구독료를 내준 것입니다. 광명을 찾았다며 너무너무 좋아하는 S의 표정이 눈에 선합니다.
S가 중국과 수용소를 떠도는 동안 부모님은 세상을 뜨셨다고 합니다. 아직도 북에는 동생들이 어려운 경제 형편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S는 요즘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앞으로 10년 정도 후면 미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는 시절이 올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고향에서 가족.친지들과 감격적인 해후를 할 날을 그리면 오늘 고생쯤은 능히 감당할 수 있다고 합니다.
S를 집으로 초대해 조촐한 밥 한끼를 함께 먹었습니다. 한 식탁에 둘러 앉아 즐겁게 먹으며, "요것이 바로 통일이단 말입니다, 통일이 뭐 별겝니까", 하며 파안대소하는 그의 표정에 공감하며 가슴이 짠 했습니다.
S를 몇차례 만나며 그의 굴하지 않는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직 식지 않은 주변의 따뜻한 인정도 확인했습니다. 사회가 각박해진다고 하지만 눈길을 주고,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은 능히 견딜 만한 곳이 되겠지요. 천성이 밝은 '악바리' 그녀의 아메리칸드림이 꼭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 탈북 - 새터민 -한국 - 미국 생활상# [진맥 세상] 이원영 시사칼럼-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