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중앙일보

광고닫기

[살며 생각하며] 다방의 추억

New York

2015.10.01 17:33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기사 공유
채 수 호 / 자유기고가·뉴저지
아침에 가게에 나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 중의 하나가 커피를 만드는 일이다. 여과지에 원두커피를 한 스푼 듬뿍 퍼 넣은 다음 커피메이커에 올려놓고 물을 부으면 쪼르륵 쪼르륵 커피 내리는 소리와 함께 진한 커피향이 가게 안에 퍼진다. 하루 두세 잔씩 마시는 커피는 맥주와 더불어 내 오랜 친구이자 기호품이다. 특히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은 밤새 느슨해진 속을 확 풀어 정신이 들게 하고 몸도 개운하게 한다.

지구상에서 석유 다음으로 가장 많이 교역되는 상품이 커피라고 한다. 커피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구한말 개화기 외교사절을 통해서였다. 개항 직후 외국인에 의해 인천에 세워진 대불호텔과 슈트워트호텔에는 부속 다방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커피는 발음을 한자어로 옮겨 가비차(加比茶) 또는 가배차라고 불렸으며 빛깔이 진해 탕약처럼 생겼다고 양탕(洋湯)이라고도 하였다.

서울 최초의 호텔 커피숍은 1902년 독일계 러시아인 손탁(孫澤 Antoinette Sontag) 여사가 정동에 지은 손탁호텔 커피숍이다. 한일합병 후인 1914년 조선호텔이 지어지자 일본인이 경영하는 최고급 호텔 커피숍이 등장하였다.

호텔 커피숍이 아닌 전문 다방이 서울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23년께의 일이다. 지금의 충무로3가에 일본인이 '후타미(二見)'란 찻집을 열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다방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일본인들은 찻집을 깃사텐(끽다점 喫茶店)이라고 불렀다.

한국인 최초의 다방은 영화감독이던 이경손이 1927년 관훈동에 차린 '카카듀' 다방이었다. 한국인들은 찻집을 깃사텐이란 일본식 이름 대신 다방(茶房)이라 불렀다. 1930년대 들어 영화.연극인 화가 음악가 문인 등 예술인들이 앞다투어 다방을 열기 시작하였다.

천재 시인 이상은 1932년 종로에 '식스나인(69)'이란 외설적인 이름의 다방을 차렸다. 이상은 다방의 의자를 앉으면 푹 꺼지게 만들고 손님들이 그 의자에 폭 파묻혀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싱글거리며 웃었다고 한다.

극작가 유치진도 그 무렵 다방을 열었는데 개업을 위해 한참 내부공사를 하고 있을 때 친구들이 들이닥쳐 커피를 대접하게 되었다. 마침 설탕이 준비가 안 되어 커피에 소금을 타 주었더니 친구들이 커피맛이 짭짜름한 게 참 좋다고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커피.설탕 등의 수입이 막혀 많은 다방이 문을 닫아야 했으며 2차대전 말기인 1945년께에는 거의 모든 다방이 폐업하였다.

8.15광복과 6.25전쟁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다방은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다시 애용되기 시작하였다. 6.25전쟁 직후 전쟁으로 문화시설이 부족해지자 다방은 단순히 차를 마시고 쉬는 장소에서 벗어나 그림전시회 문학의 밤 음악회 등이 열리는 종합예술 장소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다방은 그 절정기를 맞아 전국적으로 3만5000여 개의 다방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진한 화장을 하고 쟁반을 들고 다니는 레지들과 카운터에 앉아 돈을 받거나 전축을 틀어주는 얼굴마담 금붕어가 헤엄치는 사각형 어항 네모난 탁자에는 커다란 육각 성냥통이 놓여 있었고 동전을 넣으면 그날의 운수가 나오는 놋재떨이도 있었다. 대학 주변의 다방에서는 커다란 유리창이 달린 좁은 방안에서 DJ가 혀꼬부라진 목소리로 멘트를 하며 신청곡을 들려주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지방 중소도시를 중심으로 티켓다방이란 변종 퇴폐다방이 생겨 성매매의 온상이 되기도 하였다. 다방은 1990년대 말부터 생기기 시작한 커피전문점에 점차 밀려나 지금은 서울거리에서 다방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