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창 38:1-2/7)
오늘 본문에서 집중해서 보아야 할 단어는 ‘그 후에’입니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뒤입니까? 형제들이 요셉을 애굽에 판 뒤에,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위해 오열하고 위로받기를 거절한 뒤에입니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 유다는 자기 집을 떠나버립니다.
아마도 유다는 막내 요셉을 판 뒤에 죄책감을 느꼈나 봅니다. 그리고 형제들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아무것도 모르고 늙어가는 아버지 야곱의 모습도 보기 싫었을 것입니다. 사실 유다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야곱 집안이 전혀 은혜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형제들도, 그리고 아버지도 주변 가나안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놀라운 사실을 말해 줍니다. 유다가 형제를 떠난 뒤에 펼쳐진 삶을 보시기 바랍니다. 집안에 남겨진 형제들보다 나을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면서 가나안 세계의 가치관을 그대로 흡수한 유다는 결혼도 가나안 여인과 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자녀들을 낳아 키우고 또 뒤에는 며느리와 근친상간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집을 떠난 유다의 삶이 집에 남아 있는 형제들의 삶과 비교해서 조금도 나은 것이 없습니다. 아니 훨씬 나쁩니다.
야곱 집안은 오늘날로 치면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곳은 가나안 땅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 문제가 많았듯 오늘날 교회도 문제가 참 많습니다. 교회 안에 사랑이 없고, 형제들끼리 미워하고 어떻게 보면 세상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아시다시피 교회에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교회가 타락했어도, 세상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여도, 교회를 떠나는 것을 하나님이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아셔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아무리 문제가 많아 보여도, 그래도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모습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떠날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결국 유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집안에 환멸을 느꼈으면 그 집안을 위해 하나님께 울부짖고 기도했어야 하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니 문제 많은 집구석에 대해서는 놀랐지만 자기도 동일한 문제가 있으며, 아니 자기 속에는 더 무서운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문제없는 교회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탁 드립니다. 문제 많은 교회에 대하여 놀라지 말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문제가 많아 보여도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고, 목회자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손가락질하며 욕할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얼마나 죄성이 가득하고 사실은 내가 얼마나 죄에 쉽게 물들 수 있는 존재이고, 또한 수많은 말씀을 들어도 내가 얼마나 쉽게 변하지 않는 존재인가에 대해 슬퍼하며 기도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