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관광을 두고 여기저기서 어긋나는 소리가 들린다.
이유야 어떻든 근 60년간 닫아두었던 비경을 하루아침에 모두 열리기를 바라는 것이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금강산 다음으로 우리에게 실체를 보일 개성은 크지는 않지만 대단한 볼거리가 있는 곳으로 여러 문헌에 소개되어 있다.
개성은 송도(松都)라고도 하는데 도읍지와 연관시켜 부르는 이름도 여럿 있다.
곧 개경, 중경(中京), 송경 등이 그것이다.
이 모두 오늘의 개성을 일컫는 옛 이름들이다.
개성은 과거 고려왕조의 도읍지였을 뿐 아니라 일찍부터 국제무역이 성행한 개방의 도시였다.
현재도 개성상인, 곧 송상(松商)하면 사업상 수완이 좋은 사람을 떠 올린다.
이러한 기질은 국제무역항인 개성의 지리적 특성에서 자생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덕형은 '송도기이(松都記異)'에서 '장사하고 이익을 구하는 습관이 더욱 성하여 백성들의 넉넉함과 물자의 풍부함이 우리나라에서 제일이다'고 하였다.
또한 개성은 충절의 고장이었다.
포은 정몽주와 두문동의 충신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여인네들조차 이성계의 목을 조르는 모양을 한 조랭이떡국을 만들었다지 않는가.
개성지역의 읍지는 인조 26(1648)년에 '송도는 오백 년 동안 고려의 왕업이 있었던 곳이니, 지(志)가 없어서는 안 된다'며 김육이 완성한 '송도지'에서 비롯된다.
이후 '송도속지' 등의 서명으로 계속 증보되었다.
송경지는 이전에 완성된 여러 읍지를 참고하여 순조 30(1830)년에 나무활자로 간행한 책이다.
이 책을 간행할 당시 송도출신들은 자신의 능력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며 지역차별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은 비록 인품과 재간이 아주 뛰어난 선비가 있다 하더라도 중경(개성) 사람이라고만 하면 배척을 받는다'는 서문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을 간행한 이유 중의 하나도 이러한 차별을 없애고자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대체로 한국의 고서는 책을 펼치면 먼저 서문이 나온다.
그리고 본문이 전개된 뒤 권의 끝에 발문이 있다.
서문에는 그 책의 완성과정과 서문을 쓰게 된 동기 등이 있고, 발문에는 그 책의 간행연유가 있다.
한국의 고서는 별도의 간행기록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서문과 발문은 그 책의 간행사실을 파악하기 위한 좋은 정보원 또는 단서가 된다.
책을 간행하는 입장에서는 그 책의 권위와 가치를 돋보이기 위해 당대의 고위 관직자나 대학자에게 서문을 의뢰하는 경우가 많다.
혹 사양하다 어쩔 수 없이 서문을 의뢰받은 사람이 스스로 짓기 곤란한 사정이 생기면 문장 잘하는 사람에게 대신 짓도록 부탁하였다.
그러나 책을 간행할 때는 원래 부탁받은 사람이 서문을 지은 것처럼 하였다.
이 책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서문을 쓴 사람은 김이재(金履載)로 되어 있다.
그는 이미 개성부유수를 역임한 뒤 한성부판윤 등을 지냈던 인물이다.
이 서문만을 보아서는 대작사실을 전혀 알 수 없다.
그런데 정약용이 지은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을 보면 이 서문이 있고, '계미년(1823)에 남을 대신하여 지었다'고 되어 있다.
물론 내용 또한 완전히 동일하다.
그러니까 이 책의 서문은 김이재가 지은 것이 아니라 정약용이 지었던 것이다.
혹 이 글이 다산시문집에 남아 있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에는 '吳興劉氏嘉業堂藏書印'이라는 장서인이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청나라 말기의 장서가이며 학자인 유승간(劉承幹)의 옛 소장본이었다.
그는 한국을 이해한 지한인(知韓人)이었다.
그래서 고종 때의 문신인 서상우가 편집한 발해의 강역과 지명의 고증에 관한 연구서인 '발해강역고(渤海疆域考)'라는 책을 그가 직접 교정하여 간행하기도 하였다.
나무활자로는 한 번에 많은 부수를 찍기가 어렵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같은 책은 언뜻 보아 원문이 손상된 전본(傳本)밖에 없다.
간행될 당시의 모습 그대로 전하는 이 책은 한국에서 간행되어 중국의 장서가의 손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일본을 거쳐 미국에 왔으니 순탄치 않은 여정을 거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