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회 에미상 최우수 드라마상을 수상한 ‘로스트’(Lost)에는 어딘가 전설의 냄새가 난다. 지난 10년간 드라마 히트작을 내지 못하면서 ‘조기종영’(Already Been Canceled)이란 별명을 얻었던 ABC는 ‘로스트’로 시청률 1위을 탈환하는 기쁨을 만끽한다. ‘앨리어스’(Alias) 등을 내놓은 미니시리즈의 귀재 J. J. 에이브럼스는 ‘로스트’의 총괄 제작을 맡아 리얼리티쇼의 감각과 보이지 않는 외부의 위협이라는 스릴, 각 인물의 과거를 현재와 뒤섞는 신비감 코드를 혼합해 최고의 화제작을 빚어냈다. ‘로스트’ 폐인을 위해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새 에피소드가 방영되지 않는 동안 ‘로스트’ 출연진이 등장하는 드라마와 영화의 방영시간을 안내할 정도였다.
‘로스트’에서 부부로 출연한 대니얼 대 김(오른족)과 김윤진. 수요일 저녁 황금시간대의 최대 히트작 ‘로스트’는 할리우드의 한인들을 주목하게 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로스트’는 동시에 역사적인 드라마이기도 하다. 지난 시즌의 여섯번째 에피소드와 두번째 시즌인 올해 다섯번째 에피소드에서 한국인 부부로 출연하는 대니얼 대 김(한글이름 김대현)과 김윤진은 전체 방영기간의 절반을 한국말로 연기했다. 미국 TV 역사상 외국어 대사에 영어 자막이 이렇게 오래 계속된 건 처음이며 한국인 부부 캐릭터가 최고 화제작의 주연으로 등장한 것도 처음이다.
김윤진이 맡은 선의 남편 진 역을 맡은 한인배우 대니얼 대 김은 이런 배역이 가능한 이유의 하나로 한류를 꼽았다. “한국영화의 급부상과 큰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뛰어난 한국영화, 감독이 알려지면서 이곳의 제작자나 배우, 감독이 갑자기 한인배우들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문에 영상 부문 곳곳에서 아시안, 특히 한인들에게 돌파구가 열리고 있습니다.”
할리우드 안의 한류는 이미 시작됐는 지도 모른다. 그는 “아시안 배역이 나오면 한인배우부터 찾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할리우드의 분위기를 전했다. ‘로스트’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한류가 미국의 한인들에게 힘이 되고 한인이 만든 물결이 한류에 도움을 주는 시너지 효과를 낼 때”라고 말했다. 그 스스로도 최민식의 빅 팬이다. “연기가 환상적입니다. ‘파이란’, ‘올드 보이’, ‘쉬리’ 등을 다 봤습니다. 출신국과 상관없이 놀라운 배우입니다.”
대니얼 김은 한국인 캐릭터의 탄생에는 미국이 문화적으로 문을 열고 있다는 점과 함께 에이브럼스 총괄 제작자와 김윤진의 노력이 있다고 본다. “에이브럼스는 미국만이 아닌 전세계의 시각에서 드라마를 만들었는데 이런 제작자는 많지 않습니다. 또 김윤진은 에이브럼스를 만나 예정에 없던 진 역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두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뜨겁게 떠오르는 아시안 배우는 김윤진과 대니얼 김이다. 에피소드당 평균 2000만명이 시청하는 ‘로스트’의 인기를 바탕으로 대니얼 김은 섹시 스타로 급부상하고 있다. 연예 주간지 ‘피플’이 10명을 선정하고 네티즌의 표로 1위를 뽑는 ‘최고의 섹시남’ 투표에서 그는 유일한 아시안 배우로 5위에 올라있다. 또 지난 11일에는 바쁜 촬영 스케줄 중에도 LA에서 월간지 ‘베너티 페어’ 화보를 촬영했다. 내년 2월호에 실릴 포르셰 신차 소개 화보에 대해 그는 “내가 알기로 ‘베너티 페어’에 소수계 배우가 실린 경우는 많지 않다”면서 “촬영 제의를 받았을 때 한인, 넓게는 아시안이 주류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수준이 또 다른 단계에 들어섰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시안 배우의 캐릭터가 흔히 그렇듯 초반에는 진 역에 비판도 많았다. 아내가 웃도리 단추 한 개만 풀어도 호통을 치는 보수적이고 무뚝뚝한 한국남자로 나와 한국인이나 아시안의 이미지를 왜곡한다는 것이었다. “진과 선은 시간이 지날수록 입체적인 캐릭터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게 TV의 장점입니다. 영화는 2시간이면 끝납니다. 반면 TV는 몇 년에 걸쳐 방영되기 때문에 캐릭터가 계속 변합니다. 이제는 진과 선을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배역이라 보지 않습니다. 입체적이고 흥미로운 캐릭터로 봅니다.”
그도 자신의 배역이 초반에 아내에게 잘 못한 배역임을 안다. “한인의 이미지를 반영하지 못해서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하지만 진이 성숙해 지면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로 변하고 있고 비중도 커지고 있습니다.”
팬레터도 초반에 미국인에게 집중됐으나 이제는 한인과 한국인의 팬레터도 많다. 배역 섭외도 크게 늘었다.
최근 아시안 사이에는 김윤진 역의 선이 극중 마이클과 맺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다. “원래는 선이 마이클에게 가는 설정이었습니다. 한데 진과 마이클, 진과 선이 잘 어울리자 이 설정을 포기했습니다. 오히려 진과 마이클 사이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제작자들이 열린 마음으로 배역과 배우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반영하는 거죠.”
초반 그의 한국말 발음을 놓고도 말이 많았다. 부산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이민온 그는 부모의 영향으로 경상도 액센트가 강했다. 집을 떠난 뒤로 한국말 대화 시간이 없기도 했다. “미국 TV에서 한국말 연기를 할 줄은 상상도 못했죠. 처음엔 겁이 났습니다. 김윤진과 함께 연기한 건 행운인데 뛰어난 배우여서만은 아닙니다. 처음 에피소드 2개에서 나는 한국말이 불안해 걱정스러웠는데 한국말도 고쳐주고 편안하게 해줬습니다. 그때의 친절한 모습은 절대 못잊을 겁니다.”
에피소드마다 ‘못말리는 황소고집’ 같은 난생 처음 듣는 한국말을 익히느라 애를 먹었던 그는 두번째 시즌이 되면서 한국의 네티즌으로부터도 놀랄만큼 좋아졌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부모님과도 항상 한국말로 대화한다. ‘로스트’가 끝나도 한국말 공부를 계속할 생각이다.
한때 부모님의 뜻에 월스트리트에 진출할 생각이었던 그는 연기의 꿈에 올인해 유진 오닐 시어터 부속 내셔널 시어터 인스터튜트에 연기를 공부했고 연기교육의 명문인 NYU 티시 스쿨에서 문과석사학위를 받았다. 뉴욕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던 그는 97년 LA로 진출한 이후 ‘응급실’(ER), ‘에인절’(Angel) 등 많은 드라마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는 한인 작가가 쓴 ‘어깨 너머로’(Over the Shoulder)의 영화 판권을 샀다. 현재 각색 작업을 하고 있고 2년 안에 촬영에 들어갈 계획이다.
그가 영화화를 결심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한인을 주인공으로 한 많지 않은 소설이라는 점. 그리고 살인 미스터리물이라는 점.
“미국 관객이 한인이 주인공인 작품을 보는 건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제작자는 이런 영화로 큰 흥행을 올리기 어렵다고 여기죠. 이걸 극복할 방법은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살인 미스터리)에 한인의 독특함(한인 주인공)을 풀어넣는 거죠. 큰 작품을 만드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