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듀(due)'는 알파벳 세 글자로 이뤄진 낱말에 불과하지만 쓰임새 만큼은 여섯가지나 된다. 웹스터 사전에 그렇게 나와 있다.
렌트는 물론 유틸리티를 지불해야 하는 날짜에도, 또 출산예정일에도 '듀'가 쓰인다. '듀'는 '적법한' 또는 '정당한'의 의미로도 사용돼 다소 생뚱맞다는 느낌도 든다. 이 단어가 요즘 테러 정국과 맞물려 논란을 키우고 있다. 왜 그럴까. 바로 '듀 프로세스(due process)' 때문이다. 우리말로는 '적법한 절차'로 번역된다.
오바마 대통령이 좀 더 강력한 총기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하면 공화당이 마치 전가의 보도인 양 꺼내드는 게 '듀 프로세스'다. 적법한 절차 없이 규제하면 헌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일부 보수 언론도 변호사 출신인 대통령이 그것도 모르느냐며 비아냥대기 일쑤다. 총기규제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은 됐지만 '그 놈의 헌법 때문에.'
헌법 몇조? 수정헌법 제 5조와 14조에 나와 있다. 알려진 대로 1조부터 10조까지는 미국의 권리장전이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다. 국민의 기본권을 명시하고 있어서다. 5조의 내용은 이렇다. "누구도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는 생명과 자유, 또는 재산을 침해받지 아니한다."
그것도 못 미더워서인지 14조에도 반복된다.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 링컨이 흑인들을 지켜주기 위해 제정한 것이다.
'듀 프로세스'는 이처럼 미국의 최상위 법규정이어서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항상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영국의 식민 지배 시절, 툭하면 붙잡혀 가 곤욕을 치르고, 착취를 당했으니 '적법한 절차'가 왜 두 번씩이나 헌법에 기술됐는지 알만도 하겠다.
공화당을 비롯한 보수 우익이 총기규제 얘기가 나오면 눈에 쌍심지를 돋우는 건 이유가 있다. '적법한 절차'에 의해 총기를 구입했는데 왜 자꾸 시비를 거느냐는 거다. 더더군다나 수정헌법 제 2조엔 누구나 총기를 소유할 수 있다고 나와있는데.
지난주 샌버나디노 테러가 발생하자 오바마는 노 플라이 리스트(no-fly list), 곧 비행금지 명단에 오른 인물만이라도 우선 총기판매를 불법화하자고 호소해 관심을 끌었다. 생소한 용어여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이 리스트에 올라있는 인물이 무려 1만5000명이나 된다.
그러나 공화당 소속의 하원의장(폴 라이언)이 튕겨 버려 대통령은 체면을 구겼다. 라이언은 쥐새끼(테러리스트) 몇 마리 잡자고 집 한채(헌법)를 몽땅 불태울 수 없다는 비유를 댔다. 미국의 권력 서열 3위라는 하원의장의 생각이 이럴진대. 정치판이 이러니 요즘은 '듀 프로세스'가 마치 테러리스트 보호법처럼 들린다.
이번 참사를 일으킨 부부만 해도 그렇다. 집에 총알이 무려 수천발이나 되고 사제폭탄까지 만들어 놨다. 규제가 엄격히 시행됐더라면 이들이 구입한 총기와 실탄 규모가 당국에 보고 됐을 터. 더구나 범인들은 테러 수출국 파키스탄 출신이어서 FBI나 경찰이 진즉부터 감시를 했을 게 아닌가.
적법한 절차가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해야 할지. 테러의 역설이다.
'듀'는 라틴말의 '채무'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총기옹호론자들도 따지고 보면 이번 테러의 빌미를 제공한 바나 다름없다. 희생자들에게 '빚'을 져도 크게 졌다. 평생 갚아도 못갚을 목숨 빚이 아닌가.
또 하나. 총기규제 하나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무슨 이슬람 국가(IS)를 파괴하겠다고 야단법석인지. 민주주의의 수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