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화성남자들과 금성여자들은 서로를 발견하자마자 한눈에 반했다. 사랑의 마법에 걸린 듯 그들은 무엇이든 함께 나누면서 기쁨을 느꼈다. 비록 서로 다른 세계에서 왔지만 그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사랑하고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살았다. 그러다가 지구에 와서 살게 되자 그들은 이상한 기억상실에 빠진다. 자신들이 서로 다른 행성에서 왔고, 따라서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식하고 그것을 존중해 왔던 사실이 기억에서 모두 지워지면서 그들은 충돌하기 시작했다."
지난 25년간 가장 영향력을 미친 10대 서적의 하나로 꼽히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저자 존 그레이)에 나오는 내용이다. 남자와 여자의 갈등이 왜 생기고, 그렇다면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지 명쾌하게 제시한 책으로 남녀관계학의 바이블로 꼽힌다. 내용을 압축하자면 남자와 여자는 원래가 서로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이고, 서로 언어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른 종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착각하고 서로 자기네 별나라 방식으로 따라오라고 하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갈등을 푸는 방법은 딱 하나다. "아차, 내가 저 사람이 외계인이라는 걸 깜박했다"고 자각하는 순간, 모든 갈등이 스르르 풀리고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최근에 개인적으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친한 친구와 심한 언쟁을 벌였다. 서로 주장을 굽히지 않고 고성이 오갔다. 며칠 지났음에도 분이 삭지 않았다. 우정에 심각한 금이 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관계가 예전처럼 회복될 수 있을까 걱정도 됐다. 자존심에 먼저 손을 내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친구에게서 문자가 온 것이다.
"그래, 너 입장에서 생각해볼게." 그 한마디였다. 얼음처럼 단단하게 응결됐던 가슴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겠다는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 위력적일 줄이야. 그 말로 나는 친구를 향한 전투력을 상실했고, 당장에 술 한 잔 돌리며 우정을 회복했다.
흔히 억울한 심경을 토로할 때 "내 입장 돼 봤어?"라고 한다. 그만큼 내 입장을, 내 마음을 이해해달라는 호소다. 사장이 박봉에 시달리는 종업원의 입장을, 럭셔리 차 운전자가 노숙자의 입장을, 남자직원들이 여직원들의 입장을, 돈 많은 이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을, 젊은이가 노인들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세상엔 얼마나 많은 평화가 깃들까.
남북한이 70년 넘게 으르렁거리는 것도 따지고 보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방식만 상대에게 요구하니 매듭이 풀릴 리가 없다. 남이 북의 입장을, 북이 남의 입장을 생각해주면서 대화를 풀어나간다면 그동안 쌓인 앙금도 스르르 풀릴 터인데 말이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면 이해심이 생긴다. 동정심도 생긴다. 각진 마음이 무뎌지면서 갈등이 풀리고 사랑이 회복된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것'은 악다구니 같은 세상사를 좀더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묘약이 아닐 수 없다.
올해도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수많은 갈등과 분쟁을 겪을 것이다. '사회적 동물'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마찰의 조짐이 보일 때, 갈등을 풀고 싶을 때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연습을 하자. 무엇보다도 자신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게다가 세상을 좀더 평화롭게 만드는 데도 보탬이 된다. 그 마음, 올해 쭉 품고 갈 만하지 않은가.
# [진맥 세상] 이원영 시사칼럼-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