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풋볼의 정상에 오른 하인스 워드의 인생역정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그가 혼혈아로서 겪었던 냉대와 차별은 순혈주의 문화의 허구성과 흑인에 대한 편견을 공론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하인스 워드 효과'라 부를 만 하다.
흑인과의 족외혼이나 흑인 혼혈아에 대한 편견 속에는 피부색을 인종서열화의 기준으로 삼는 전근대적 사고가 잠복해 있으며 이는 시공을 초월해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미국에서는 '피 한 방울의 법칙'(One-Drop Rule)이 오랫동안 인종분류의 준거로 존속해왔다. 부모나 조상가운데 흑인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였으면 외모와 상관없이 흑인으로 분류한다는 법이다. 그러나 역으로 백인 피가 섞인 흑인을 백인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노예제가 정착한 이래 백인 농장주가 흑인 여성노예를 성적 노리개로 삼은 일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런 성적 유희의 부산물인 혼혈자녀를 흑인노예로 규정해 사유재산으로 삼고 또한 백인과 흑인간의 족외혼을 방지할 목적으로 생겨난 것이 바로 '피 한 방울의 법칙'이다.
이 제도는 1840년부터 사회통념으로 둥지를 튼 이래 점차 확산돼 1920년쯤에는 20여 주에서 법으로 채택되었다. 검은 피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제도화한 순혈주의의 극치인 셈이다.
특히 남북전쟁 종전 이후 재건시대라 불리는 10년간 흑백간의 결혼이 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각 주마다 족외혼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흑백부부에 대한 결혼증명서 발급이 거부되었고 혼혈아동은 어둠의 자식 취급을 당했다.
당시 흑인으로 분류되는 것은 천형이나 다름없었다. 참정권과 부동산 소유와 거래 등 많은 제약이 따랐기에 일부 혼혈인은 신분을 감춘 채 백인 행세를 하거나 정부를 상대로 재분류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인종간 족외혼 금지법이 철폐된 것은 1967년 연방대법원이 이를 위헌으로 판결하면서부터다. 연방통계를 보면 1970년 전까지 타인종간 결혼비율은 전체의 0.7%에 불과했다. 이후 인종간 결혼은 증가 추세를 보이지만 2000년 기준으로 전체 결혼의 5%를 조금 웃돌 뿐이다.
조금 더 자세히 뜯어보면 흑인과의 결혼 비율이 제일 낮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지금도 결혼시장에서는 흑인과의 결혼을 사회적 지위의 하락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사랑에도 인종이라는 장벽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인종적 편견이 일찌감치 세계화의 물결을 탄 탓인지 많은 한국인이 흑인에 대한 편견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고 이민 보따리 속에 이를 함께 가져온 듯하다.
흑인 민권운동 덕에 인종차별적인 이민법이 철폐되어 미국으로 올 수 있었고 흑인을 상대로 한 사업으로 인해 한인사회가 번영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에 대한 한인의 냉대와 멸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다.
더욱이 주거지역 선정기준이나 자녀 배우자 선정의 잠재순위를 따져보면 흑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가 마냥 남의 일인 양 손가락질할 만한 일도 아닌 듯 싶다. "한국사람이 흑인을 언제 사람같이 취급했느냐?"는 워드의 모친 김영희씨의 일갈은 우리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꽈리를 틀고 있는 편견에 대한 비수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흑인병사와 결혼했던 여성을 멸시하던 그 악습의 더러운 '피 한 방울'이 아직도 내 몸 속에 흐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