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2년 10월 5일에서 10월 14일까지! 로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난 흔적이 없다. 이 기간 동안 단 한 사람의 출생도 사망도 결혼도 없었고 길가다 넘어져 다치거나 봉변당한 사람은 물론 단 한 건의 전쟁도 평화도 심지어 교회의 종소리조차 울리지 않았다. 이유는 10월 4일 목요일 잠자리에 든 로마인들이 예외없이 10월 15일 금요일 아침에 깨어났기 때문이다. 지금 같으면 상상조차 힘든 10일의 대축일(縮日) 조치가 교황 그레고리 13세의 칙령에 의해 전격 단행되었던 것이다.
지난번에 본 것처럼 율리우스력은 365.25일을 지구회귀시간으로 계산하므로 실제보다 매년 0.0078일 빠르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매 4년에 한 번 두는 윤년이 1600여 년 흐르면서 혼선을 빚어 달력상의 춘분이 실제보다 10일 이상 늦게오는 맹점이 있었다. 따라서 개혁 달력의 핵심은 회귀시간대의 조정과 윤년 규정의 예외조항 신설이다. 그래서 매년 춘분이 3월 21일에 예외없이 반복되고 보름 뒤 첫 일요일의 부활절 축제가 전 가톨릭 국가에 동일 동시에 지켜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레고리 13세는 종래 365.25일로 계산한 1년을 365.2425일로 조정한 뒤 윤년 규정에 예외조항을 두었다. 즉 4로 나눠지는 해는 윤년으로 하되 100으로 나눠지는 해는 평년 그러나 400으로 나눠지는 해는 또다시 윤년을 두므로 400년에 100번 오던 윤년을 97번만 오게 해서 향후 3000년 동안에는 예외없이 3월 21일이 춘분이 되는 묘수를 찾은 것이다.
사실 그레고리의 개혁력은 태양 및 지구의 운행 주기와 화합한 과학력인 동시에 계절의 변화에도 어느 정도 일치하는 합리성을 지닌 달력이다. 그러나 완벽한 달력이 꼭 개혁을 부르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종교적인 인식이나 영향력이 다른 나라가 그레고리력을 받아들이는데는 수백 년의 거치 기간이 필요했다. 가령 당시 교황의 그늘에서 비켜선데다 새해조차 1월 1일이 아닌 3월 25일로 지키던 영국은 1752년 9월 2일 다음날을 9월 14일로 볼세비키 혁명으로 두서가 없었던 러시아는 300년도 더 지난 1918년 1월 31일 다음날을 2월 14일로 선포하는 등 채택 연도가 각각 다르다. 그 외에도 덴마크와 노르웨이 등 동구권이 1700년 일본이 1871년 대한제국은 1895년에 비로소 서기로 표현되는 그레고리력을 표준력으로 삼았다. 그 결과 동일한 사건이나 인물의 출생 및 사망일이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역사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얼마 전 아이슬란드를 무대로 한 연예 프로그램을 시청한 적이 있다. 만년설로 뒤덮인 산하와 유빙으로 가득한 바다 더운 김을 쏟아내는 노천탕과 폭포 바다를 가로지르는 멋진 다리 고풍스런 교회와 시가지가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12월 초순 때이른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퍼지는 상가와 거리의 불꽃 장식이다. 그리고 화면 속 누군가가 "이 나라는 크리스마스가 공식적으로 12월 12일부터 12월 25일까지"라는 멘트를 날린다. 아! 그렇다. 수백 년 동안 이 나라는 덴마크의 지배를 받으면서 넘겨받은 율리우스력의 흔적이 유빙처럼 전통이 되어 흐르는구나 싶었다.
그레고리력의 기년방식(記年方式)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전후로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로 한 구분이다. 예수의 탄생 전후를 인류 역사의 가장 큰 변곡점으로 보고 인간 및 대자연의 변환을 그 축선에 맞춰 조명케 한 것이다. 얼마나 슬기롭고 일목요연(一目瞭然)한 역사 표기법일까!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자 거룩한 동의가 아닌가 싶다. 만약 종교적인 이유나 전통 때문에 각국이 자기 입맛에 맞는 연호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가정하면 지금 세상은 형태나마 존재할까? 아마 상상할 수 없는 대재앙이 지구 종말을 부추겼음은 2000년도에 벌어진 전산(電算) 체계의 대혼란을 통해 가늠할 수 있으리라.
한편 우리나라는 조선 개국 504년인 고종 32년에 조칙을 내려 그해 음력 11월 17일을 서기 1896년 1월 1일로 선포하면서 양력을 사용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학교와 자녀들은 단기(檀紀)와 서기(西紀)를 혼용하고 부모님들은 음력을 신봉하는 '한 지붕 3달력' 시대가 있었다. 그러다 1961년 5.16 군부세력이 등장하면서1962년 1월 1일부로 단기 사용은 폐기되고 양력이 합법적인 국가 기년방식으로 자리하였다. 그러나 음력은 여전히 국가 고유 전통문화의 그림자처럼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 이상으로 태양력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다음에는 음력과 농어촌에서 교범처럼 받드는 24절기에 관해 알아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