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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명품족, 로데오 간다…겁없이 지른다

Los Angeles

2006.04.07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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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품 없으면 왕따' 풍조도 문제
‘빌리거나 혹은 훔치거나.’
럭서리 핸드백 대여업체인 ‘bagborroworsteal.com’이 내건 이 슬로건은 인간의 명품 소유욕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명품은 부담없이 소비할 수 있는 일부 계층을 제외하면 아무래도 쉽게 접근하기에는 버거운 대상이다. 그러나 한인사회의 명품 소비는 경제적 형편과는 무관한듯 ‘대중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세계적인 명품의 거리 ‘로데오 드라이브’는 일부 한인들의 ‘명품 심리’가 여과없이 드러나는 현장이다.


# 3일 오후 로데오 드라이브. 명품에 눈을 뜨기 시작한 한인 여성들이 통상 가장 먼저 찾는다는 '기본 코스'의 루이비통 매장.

문을 열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매장 입구에 서있던 직원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널찍하고 쾌적한 매장 안을 채우고 있는 20여명의 샤핑객 중 절반 이상이 동양인이었다. 계산대 앞의 두 여인은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1만 달러를 훌쩍 넘지만 없어서 못판다는 에르메스 벌킨 백을 든 니트 차림의 중년 여성과 스키니진에 웨스턴 부츠 디올의 가우초 백을 휘감은 20대 초반 여성은 모녀인 듯 했다.

이미 한차례 샤핑을 끝낸듯 큼지막한 샤핑 백 뭉치를 양손에 나눠든 중년 여성이 한국말로 무엇인가를 말하면 젊은 여성이 그말을 되받아 영어로 점원과 대화를 하는 듯 싶더니 이내 스카프와 핸드백 2개가 계산대에 올려졌다.

물건 값을 치르는데 망설이거나 행여 제품에 흠집이라도 있을까 살펴보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명품 브랜드를 판매하는 고급 백화점 '바니스 뉴욕'.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왼편으로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요즘 한인 여성들에게 가장 인기라는 발렌시아가 핸드백이 '좌판'에 주르륵 놓여 있었다.

잠시후 한인으로 추정되는 비슷한 또래의 여성 2명이 백화점에 들어섰다.

점원에게 무언가 말을 건넨 이들은 점원으로부터 색상만 다른 같은 디자인의 핸드백 2개를 받아들었다. 자신들의 어깨에 백을 한번씩 걸쳐본 이들은 그 자리에서 신용카드를 긁었다. 개당 1500달러 가까이 하는 핸드백을 고르고 계산 하는데 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5분.

핸드백 샤핑을 끝낸 이들은 맞은편 신발 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들은 이 신 저 신을 신어보더니 마음에 드는 것들을 차례로 계산대로 가져다 놨다. 뒤이어 점원에게 계산대에 올려진 신발들과 같은 똑같은 그러나 사이즈가 자신들의 발에 맞는 것으로 가져달라고 주문했다. 이 여성들이 골랐던 신발은 각각 520달러와 345달러 짜리. '삽시간' 샤핑에 이들이 지출한 돈은 수천달러. 웬만한 직장인 한달 월급을 한참 넘어서는 돈이다.

# 매장 몇 군데를 돌고 거리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을 가득 실은 대형 관광버스가 파란 신호를 기다리며 서있었다. 버스 옆면에 영어 철자로 표기된 한국어가 눈에 들어왔다. 가이드로 보이는 남성이 마이크를 들고 차내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고 양옆 좌석에 앉은 동양인들은 버스 유리창에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분주하게 이곳 저곳을 살폈다. 저만치 버스가 정차하면서 거리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무리 가운데서 "저쪽이야"라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들만의 '집단 로데오'가 반복되는 순간이었다.

"유달리 명품을 밝힌다"는 한인들이지만 저마다 '사연'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겉치레를 중시하는 문화가 큰 몫을 하는 가운데 울며 겨자먹기로 명품 샤핑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결혼 8년차 30대 후반의 전업주부 진모씨는 최근 수년간 모았던 뭉칫돈을 털어 2000달러가 넘는 핸드백을 구입했다.

"남편 몰래 질렀어요. 부부동반 모임이나 격식을 차려야 하는 모임에 이런 핸드백 한 개는 들고 나가야 남편 체면도 살지 않겠어요. 한편으로 제 나이에 반듯한 명품 하나 없다는 게 자존심 상해서 큰 맘 먹고 샀지요." 명품을 사지 않을 수 없는 문화 탓이라는 게 진씨의 설명이다.

사무직에 근무하는 30대 중반 그레이스 김씨는 "처음엔 수백달러의 가격에 손이 벌벌 떨렸는데 자꾸 사다보니 이젠 수천달러 짜리도 겁없이 사게 된다"며 "명품 브랜드를 몸에 걸치면 왠지 자신감이 생겨서 다른 사람을 만날 때 더 당당해진다"고 말했다.

물론 명품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한인들도 적지 않다. 30대 후반 직장여성 캐런 강씨는 "비싼 물건은 아무래도 편치가 않다. 때문에 쓰지 않고 집안에 '모셔 두게' 된다. 그래서 명품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40대 중반 에스더 김씨도 명품 브랜드에 부정적이다. "한인 마켓 샤핑객들을 보자. 명품 가방 안든 여성이 없다. 한예로 L사 핸드백은 너무 흔해서 하루에도 몇번씩 같은 가방을 든 여성을 본다. 명품이 그렇게 흔해 터진 것인가."

명품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각이 상존함에도 불구 한인중 상당수가 명품에 집착하는 것은 왜일까.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김 박사는 한인들의 명품 소비심리에 대해 "남과 다르고 싶은 심리"를 우선 꼽는다. 그는 "물질적 풍요가 커지면서 남과 다르고 싶은 욕구가 명품을 통해 분출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30~40대 이하의 젊은 세대들은 남이 갖지 못하는 물건을 소비하는 것을 "자신을 존중하고 아끼는 행위"로 합리화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절약'을 미덕으로 여겼던 부모세대와는 다른 점이다.

또 일부 학자들은 명품소비 확산은 물질 만능주의의 단적인 예라며 명품을 통한 무분별한 자기 과시는 자신감 결여와 삶에 대한 불만에서도 비롯될 수 있다고 말한다.

최근 십수년 사이 부쩍 경제력이 향상된 한인사회에서 한동안 '명품 사냥' 추세는 계속될 것이라는 게 이들의 진단이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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