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도 용기다.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버리는 것도 지키는 것만큼 힘들다. 없는 사람은 지킬 것도 포기할 것도 없다. 많이 가질수록 무엇을 어떻게 버려야하는지 가늠하기 힘들다. 세상은 어떤 것에도 굽히지 않고 포기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움켜쥐고 살라고 말한다. 남들보다 한 걸음 더 나가야하고 더 많이 가져야하고 더 배워야하고 그래서 성공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H는 내 고객 중 고객이다. 이웃 도시 이름이 그녀 남편 이름 따서 생겨났다고 하니 부자 중의 부자인 게 틀림없다. 미국에는 도시나 길 이름이 사람 이름으로 된 곳이 많다. 세상에 유익을 끼쳤거나 크게 가문을 일으킨 사람들의 업적을 기리고 칭송하기 위함일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만큼, 아는 만큼의 잣대로 상대를 측정한다. 그냥 적당히 벌어 그럭저럭 사는 평민인 나는 그녀가 얼마나 부자인지 짐작조차 못한다. 완공을 앞둔 집이 궁전 크기라는 것, 그녀가 쓰는 수표에서 제로를 두서너 개 지우면 내가 쓰는 수표와 동일하게 된다는 것 정도다.
미국이 좋은 건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옆 자리에 앉아 맥도널드에서 아침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 H는 초콜릿을 좋아한다. 화랑에 들를 때마다 초콜릿 담아둔 볼을 뒤져 호두 넣은 초콜릿을 요리조리 골라 먹는다. 다른 고객과 별반 다르지 않다.
높거나 낮거나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손님은 '왕중왕' '고객은 항상 옳다'는 소신으로 우리 화랑은 손님을 대한다. 과잉 친절을 베풀거나 빌붙으면 오히려 얕잡아 보고 거래를 그르친다. 돈 적은 사람이 돈 많은 사람에게 돈으로는 승부 못한다. 못난 여자가 예쁜 여자와 미모로 이길 수 없는 진리와 같다. 내 모습 그대로 정성과 사랑으로 버티는 게 가장 잘 먹힌다. 이번 밸런타인스데이 이벤트에서 작품 몇 개 구입한 게 고마워서 아기자기한 초콜릿 담긴 작은 바구니를 선물했는데…. 아뿔싸!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초콜릿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는 것. 그래도 사순절 끝나면 먹으면 된다고 어린 아이처럼 무척 좋아한다.
사순절은 인류 구원을 위해 예수가 겪은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기 위해 부활절 전 40일간 경건하게 지내는 기간을 말한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라고 세 번 묻는다. 사랑은 모든 절망과 고통, 아픔과 유혹을 견뎌내게 하는 묘약이다. 누구를 죽도록 사랑해 본 사람은 그 사랑을 베풀 줄 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버리는 포기각서는 세상욕심 버리고 예수를 섬기듯 이웃을 사랑하라는 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99도까지 온도를 올려놓아도 마지막 1도를 넘기지 못하면 영원히 물은 끓지 않는다. 물을 끓이는 건 마지막 1도, 포기하고 싶은 바로 그 1분을 참는 것이다"라고 김연아는 고백한다. 포기해야 할 것, 포기하면 안 되는 것들을 구별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참고 견뎌내는 자만이 생의 중요한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 죽음이 다가와도 영생을 믿으며 덜 후회하며 살 수 있기 소망한다. 스스로 짊어진 십자가 내려놓고 무거운 생의 군더더기 포기하게 되길. 그 포기 속에 사랑으로 가득찬 배낭 매고 가볍고 명쾌하게 남은 시간 쌩쌩 질주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