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샤넬, 루이뷔통, 발렌티노, 탐 포드…. 패션에 대한 관심여부를 떠나 이들 브랜드가 패션 명품 브랜드라는 것을 한 번 쯤은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남녀를 불문하고 이들 브랜드를 소유하기를 바라고, 심지어 ‘섹스 앤 더 시티’의 콧대높고 잘 나가는 뉴요커인 사만다처럼 웨이팅 리스트의 순번을 줄이기 위해 고객을 사칭해 새치기 하는 만행(?)까지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일까?
이들은 잠재된 내면에 있는 ‘남들과 다른, 뭔가 특별하고자’ 하는 소수 마케팅에 집중, 대중화라는 꿈을 접은 대신 특별함으로 어필에 성공한 케이스들이다.
비단 패션에만 이러한 소수 정예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와인의 세계에도 소수 정예가 있었으니, 이것을 이른바 ‘컬트 와인’이라고 한다. 이는 1980년대 초 캘리포니아가 와인 생산지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등장하여 1990년대 중반 신흥 와인 업자들이 소규모 농원에서 독특한 개성을 살려 만든 최상급 한정생산된 와인들에 붙여진 용어로, 2000년 미국의 와인 전문 잡지 ‘와인 스펙테이터’에서 컬트 와인을 집중 소개하면서 유명해졌다.
소규모 농원에서 한정된 양만 생산된다고 해서 부티크 와인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이들 대부분이 나파밸리에서 재배한 카베르네 소비뇽을 이용하기 때문에 컬트 캡이란 별명도 갖고 있다.
보통 캘리포니아 컬트 와인이라 함은 스크리밍 이글(Screaming Eagle), 할란 에스테이트(Harlan Estate), 콜긴(Colgin), 셰이퍼(Shafer), 신콰논(Sine Qua Non), 아라호 (Araujo), 브라이언트 패밀리(Bryant Family) 등을 일컫는다. 굳이 와인 매니아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법 한 ‘오퍼스 원’이 이들 컬트 와인의 효시였다. 신대륙 와인의 개척명가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와 구대륙 와인의 전통명가 샤또 무통 로췰드, 이 두 가문이 손잡고 만들어 낸 1983년 첫 번째 빈티지는 첫 시장 데뷔 때부터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품질도 그러했지만, 특히 당시 시중 와인의 10배가 넘는 가격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그 뒤를 이어 최고급 와인들이 나파밸리 지역에서 출시되자 와인 비평가들은 너나없는 찬사를 보냈고, 특히 세계 최고의 와인 평론가인 로버트 파커가 그 중 몇 몇에 100점 만점을 주면서 이들 컬트 와인의 추종에 불을 지폈다.
여기 기름을 부은 것이 이들만의 독특한 판매 시스템이다. 한 와이너리에서 한해에 생산되는 양이 평균 600케이스밖에 되질 않고, 해마다 출시되는 가격의 몇배가 오르기 때문에 구매자 명단인 '메일링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 있어야만 구매가 가능하다. 돈이 있다고 척척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미국 최상류층에서는 아내가 아이를 임신하자마자 아직 낳지도 않은 아이의 이름을 이들 리스트에 올린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리스트 꼭대기에 오른 회원들의 사망이나 파산 등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을 바라며 결원이 생기길 내심 기대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이러한 콧대높은 최상급 컬트 와인들중 수확 2년만에 파커 포인트(RP) 100점을 받은 최상급 와이너리가 있어 많은 관심을 받고있다. 심지어 오퍼스 원도 수확5년 만에, 또 한병에 평균 3000달러에 판매되고 있는 스크리밍 이글도 수확 4년만에야 100점을 받았다. 하지만 거의 첫 수확으로 탄생한 와인으로 100점을 받은 이 와이너리가 있으니 바로 한국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다나 에스테이트(Dana Estate)’이다. 나지막한 포도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고 있는 나파밸리에 위치한 와이너리로, 이 명품 와인을 생산하는 다나 에스테이트의 주인은 이희상 동아원(옛 동아제분) 회장이다.
오직 완벽한 와인을 국내에 유통시키고자 한 이 회장의 집념으로, 잘 꾸며진 조경 등의 외관이 아닌 흙 자체의 성분과 토질을 분석하여 까다롭게 고른 끝에 다나 에스테이트는 헬름스 빈야드(Helms Vineyard)를 포함해 포도원과 포도원 사이의 거리가 5km 이상 떨어진 곳에 로터스 빈야드(Lotus Vineyard), 허쉬 빈야드(Hershey Vineyard) 등 3개의 포도원에서 와인이 생산되며, 한병에 평균 700~800달러에 판매되고 있다.
삼성이 전세계 전자시장을 장악했듯이 세계 모든 분야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항상 정말 자랑스럽다. 이젠 와인에서도 한획을 그었다는 것이 더더욱 뿌듯하다. 사실 와인의 종주국도 아닌 나라 출신의 생산자가 최고급 명품 반열의 와인을 생산한다는 그 자체가 더 의미가 있는 듯 하다.
몇 년 전 한국에서는 소위 ‘샤테크’라는 것이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해마다, 아니 분기마다 가격을 올리는 샤넬사의 가격정책 탓에 ‘지금 사지 않으면 나중에 몇 배의 가격을 주고 사야 할 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루머가 돌아 너나없이 그 비싼 샤넬 백을 사 놓곤 정작 아까워 들지도 못하고 장롱 안에 넣어 두고는 낡은 가방을 들고 다닌다는 얘기를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와인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유명 빈야드와 생산자, 빈티지만 맹신하며 묻지마 식의 팬덤을 형성하는 소수 컬트 와인 추종 매니아들 때문에 사놓고 죽을 때까지 아까워 절대 맛보지도 못할, 수 천 달러를 호가하는 와인들의 상품가치가 올라가고 있다. 그렇지만 이 와인들의 역사와 지난 판매가격들을 볼때 실제로 그만큼의 가치가 있느냐는 조금 두고 봐야 할듯하다.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와인을 가격이나 이름만 가지고 평가하기보다는 생산자의 철학과 그 와인을 생산해 내기까지의 노력과 품질을 감안해서 고른 와인을 좋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시간이 훨씬 더 가치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