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일본에 간 때는 1968년이었다. 지난 달 친구와 강남 가듯이 40년 만에 다시 니꼬에 갔다. 니꼬에서 도꾸가와 이에야쓰의 3대 사당이 있는 명소에 다시 들렀다. 이슬 같은 봄비에 젖은 씨다 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싱그러운 나무 향기에 취해서 신선이 된 듯했다.
1960년 중반 금성사에서 처음으로 선풍기를 생산했다. 딸이 선풍기 날개에 젓가락을 집어 넣어 날개를 부러뜨렸다. 애프터서비는 엄두도 못 내는 시절이라 금성사에 근무하던 시동생이 날개를 구해 보내주었다. 6살이었던 아들은 서울시장의 처가 권속이었던 옆 집에서 귀한 텔레비전을 보다가 바지에 오줌을 적셔서 돌아왔다.
때문에 파월장병의 귀국 컨테이너에 실려온 모토롤라 텔레비젼 수상기를 어렵게 구입했다. 또한 합승이 보편적일 때 아이가 딸린 사람은 택시를 잡을 수 없어서 두 아이를 골목에 숨겨두고 혼자인 것처럼 차를 잡던 시절이었다.
담징의 벽화를 찾아서
지난 68년 여름방학 첫 해외 나들이로 나선 일본의 어느 가정에서 먹은 아침은 완벽한 서양식이었다. 현대식 건물의 유리 출입문과 전기밥솥 또한 놀라웠다. 기찻길 지나가는 마을마다 지금 서울에 솟은 교회 십자가보다 조금 많은 TV 안테나가 있었다.
그 때 담징의 벽화가 있는 법륭사를 찾았다. 그런데 담징의 흔적조차 없었고 안내원 중 아무도 담징을 모르고 있었다. 이미 담징이 사라졌었다.
그러한 섭섭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선진기술과 예를 갖춘 생활관습만으로도 반세기는 앞섰다는 생각을 하였었다. 한국 전쟁과 그 후의 월남전에서 미국 트럭에 바짝 따라 붙어서 마치 불자동차 뒤에 붙은 차처럼 초고속 성장을 챙긴 일본은 지금 정상급의 국가 위신을 획득하였다.
이번 여행 중에는 마침 우에노 공원 내 동경국립박물관에서 법륭사 보물전시가 열렸다. 절 한 개의 소장품으로는 놀랄 만큼 키가 같은 40점의 보살상 구리판을 종이오리듯이 도려내어 레이스로 만든 주렴처럼 섬세한 장엄구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담징이 중국인 담만으로
우리는 일본에서 발굴이 있으면 어떻게 든지 남보다 먼저 가서 보고 우리나라가 전수한 것이라는 글을 득달같이 발표한다. 일본 쪽에서 보면 설사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지긋지긋하지 않겠는가?
자료실에서 오후를 다 보내며 법륭사 금당에 관한 책만 5권을 뒤졌다. 내용을 추려본다.
"법륭사 금당은 1949년 1월26일 원인모를 화재로 전소되었고 1953년에 불에 탄 기둥을 수지로 굳혀서 숯기둥을 다시 세워 준공하고 내부는 1968년(소화 43년-내가 첫 방문한 몇달 후) 11월에야 벽화와 장엄을 재현했다. 1935년 교토의 사진관인 편이당이 촬영한 50x60cm 크기의 분할사진 385장 중 20장을 적외선과 첨단기술로 원색분해판으로 되살려 벽화를 재현하는 귀중한 표본으로 삼았다.
그중 아미타 정토는 무량수경에 의한 벽화로 중국의 북위(386-534) 사람 담만(476-554)이 그린 초기 정토 그림에서 따온 것으로…(담징의 담자만 흔적으로 남았다) 11면 관음보살의 허리띄의 격자무늬와 비단옷의 구슬띠문양은 페르시아의 사산조의 직조문양이어서…역자의 문양은 중국 한나라 때 공예양식이 조선반도를 경유하여 직접전해졌고…."
이런 형편이다. 본관에서는 일본 불교인 천태종 개종 1200년 보물전이 있어서 뛰다시피 돌아 보는데 일본의 불교 조각은 나무부처 중에 두점의 철불이 작지만 의젓이 앉아있다. 교토의 절에서 출품한 것인데 절 밖으로 나온 것은 처음이라고 썼고 제작 연도나 출처 설명이 없지만 단전 앞에 모두어 꺾은 손의 수인과 몸의 선과 각도 좌우 대칭의 옷 등 그것은 분명 삼국시대의 철불이었다.
이젠 대장금과 '욘사마'
교토는 삼국문화로 세례를 받은 지역이지만 일본문화 속에서 담징을 잃었고 집요하게 삼국이나 조선의 영향에 대한 흔적을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배제하는 일본의 문화사는 정사로 비춰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감탄할 만한 일도 아주 많다.
니꼬에서 자갈 뜰에 떨어진 나뭇잎을 빗자루로 쓸어낼 수 없어서 자갈을 하나씩 들어내고 나뭇잎을 긁어내고 자갈을 되돌려 놓는 청소 방법은 청소가 아니라 신경질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 주말 경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승객이 지나가는 경주역 청사 왼쪽에 시퍼런 플라스틱 화분이 잔득 있고 지난 추위에 얼어죽은 꽃배추의 시체가 널부러져 덮였다. 5월1일 노동절이라 사람들이 쉬기 때문일까 참으로 어이없다.
나무 한그루 난간모퉁이나 문고리 한 개도 소홀히 하지 않은 일본과 허물어져가며 기울어진 첨성대가 있는 나의 원점인 경주 올 때마다 가슴이 저민다.
니꼬의 경우 호텔에서 올라타는 공항버스 첫 줄에 예약석이라고 쓴 표찰이 있었는데 어느 호텔에서 아이 손을 잡은 부인이 타니 기사가 내려가서 정중히 예약석으로 안내한다.
미쓰꼬시 백화점 화장실은 작은 응접실 같다. 변기 앞쪽 코너에 놓인 설치물은 공간활용 아기 걸상이다. 아기 안고 화장실에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한국 남자들은 아는가 모르는가.
이 모든 공공시설의 편의와 우대는 아이 낳는 것을 장한 일로 생각하게 만드리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제도 역시 뒷받침할 것이다.
나는 다른 때처럼 일본에서도 비녀를 꽂았다. 15여년 전에 비해서 '조센징(조선인)'에 대한 거부반응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비행기에서는 '욘사마'를 새긴 수정 액자를 한정 판매하고 공항의 대형 TV에서는 대장금을 '소녀 장금'이라는 만화로 바꾸어 방영하고 있었다.
미술도구상이 있는 야스꾸니 도로와 고가 교차 코너에 있는 스포츠 용구 체인점 빅토리아 빌딩에 초대형 현수막이 있는데 한국 축구선수 박주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