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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상황 중심의 한국어

New York

2016.03.30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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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현 용 / 경희대 교수·한국어교육 전공
한국어는 맥락 중심의 언어다. 다른 말로 상황 중심의 언어라고도 할 수 있다. 상황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생략이 많다. 이런 문화적 특징을 '고맥락(高脈絡)'이라고 한다. '고맥락'이라는 말은 맥락에 의존도가 높다는 의미다. 즉 '말'에만 의존하는 문화가 아니라는 의미다. 주로 '고맥락' 문화는 농경문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농경문화라는 말은 정착 문화라는 의미도 된다. 같은 지역에 항상 모여 사는 사람들은 서로의 상황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표현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른바 전라도 방언에서 '거시기'라고 하면 수많은 뜻이 있음에도 서로 이해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맥락 중심의 가장 대표적인 상황이 주어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구어에서는 거의 주어가 없다. 주어가 있으면 오히려 이상한 경우가 많다. 주어가 필요한 언어에서는 주어가 없는 문장을 매우 부족한 표현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가주어(假主語)'까지 만들게 된다. 하지만 한국어 화자들은 '가주어'를 만드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주어의 남발이라고 생각한다. 목적어의 경우도 한국어에서는 상호 이해가 가능한 상황에서는 사용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영어나 중국어에서는 '주어 + 사랑한다 + 목적어'의 구조를 보인다. 그래서 'I love You/我 愛 汝'의 표현이 사용된다. 하지만 한국어의 경우는 어떤가? '사랑해요'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주어도 목적어도 필요 없다. 내가 너를 보면서 말을 하는 상황인데 주어와 목적어가 왜 필요한가 하는 논리다. 만약 다른 사람이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상황이나 내가 너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상황이라면 주어나 목적어가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상황에 서로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분명하게 대상을 밝힐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 화자에게 상황의 이해가 중요하다는 것은 '눈치'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국어의 속담에 '눈치가 있으면 절에 가서도 새우젓을 얻어먹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눈치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눈치는 서로에 대한 관심이다. 관심이 있으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척하면 척이다'라든지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안다' 등의 표현도 나왔다. 이렇게 서로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상황을 서로 잘 아는 경우에는 '고맥락'의 의사소통이 된다. 상황을 잘 모르거나 관심이 적은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의사소통이 어렵다. 이런 경우에 '말이 안 통한다' 또는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는 식의 표현을 한다.

한국어에는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돌려서 말하는 완곡어법이 발달하였다. 많은 높임법의 어휘들이 사실은 완곡어법과 관련이 있다. '죽다'라는 말 대신에 '돌아가시다 눈을 감다' 등의 표현을 쓰는 것도 그렇고 '아프다' 대신에 '편하지 않다'는 의미의 '편찮다'를 사용하는 것도 그렇다. 돌려서 말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는 태도를 보인다. 물론 꺼리는 말이기 때문에 돌려서 표현하는 경향도 있다.

또한 한국어에는 부정확한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우리'라는 표현이 외국인이 가장 어려워하는 어휘 중의 하나다. 우리가 남을 포함하는 것인지 아닌지가 늘 혼동된다. '아줌마' '아저씨' '언니' '이모' 등의 호칭도 매우 어렵다. 대부분 친척이 아니라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쓰인다. 어떤 경우에는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을 약간 낮추어 말할 때도 사용한다. 시간을 이야기할 때는 더 부정확하다. '한 네 시쯤'과 같은 표현에서 '한'과 '쯤'은 모두 부정확한 시간을 나타낸다. 부정확한 표현을 반복해서 쓰고 있다.

한국어는 상황에 대한 이해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정확한 표현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한국어의 고맥락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표현으로는 '말이 필요 없다'나 '말로 다 할 수 없다' 등이 있다. 한국어 화자의 생각에 가장 좋은 의사소통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말을 하지 않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게 없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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