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몰리션(Demolition) 감독: 장 마크 발레 출연: 제이크 질렌할, 나오미 와츠 장르: 드라마 등급: R
영화 '데몰리션(Demolition)'은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부인 줄리아를 잃게 된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다. 장인이 경영하는 투자 은행에서 승승장구하며 평탄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던 데이비스는 갑작스런 상실감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조금씩 이상하게 변해간다. 겉으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멀쩡히 일상에 복귀한 듯 행동하지만, 그의 일상과 내면은 철저히 망가지고 자기파괴적으로 변해간다. 자판기 회사 고객 불만 접수처에 매일같이 편지를 써 미주알고주알 자신의 일상과 감정을 털어놓는 괴상한 짓도 마다 않는다.
몇 번의 편지를 보낸 끝에, 데이비스는 자판기 회사 고객 서비스 담당자 캐런(나오미 와츠)에게 전화를 받는다. 새벽 2시에 걸려온 전화다. 캐런도 나름의 상실을 경험하고 그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여자다. 약간의 숨바꼭질 끝에 둘은 친구가 된다. 서로를 이해하고 의지가 돼 주지만, 선을 넘는 법은 없다. 그렇다고 둘의 마음을 할퀸 상실감이 완벽히 치유된 것도 아니다. 데이비스는 여전히 몸을 혹사하고, 아내와의 추억이 서린 집을 부수고 허물어가며 허전함을 달랜다.
영화는 관객에게도 결코 슬픔을 강요하지 않는다. 기이하게 변해가는 데이비스의 일상도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엉뚱하고 코믹하게 그린다. 인부들에게 돈까지 쥐여주며 공사현장에서 막노동을 하거나, 말쑥한 셔츠에 헐렁한 면바지, 작업용 워커를 신은 채 흘러간 록음악을 들으며 뉴욕 거리를 누비는 데이비스의 모습을 담아낸 장면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장면들이 오히려 보는 이의 마음을 후빈다. 데이비스에게 깊이 이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와일드'나 '댈러스 바이어스 클럽' 등을 통해 아프고 고통 속에 있으나 기어이 이를 이겨내고자 애쓰던 인물들을 실감나게 그려내며 관객의 공감대를 샀던 장 마크 발레 감독의 특출난 솜씨 덕이다.
늘 극단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며 광기에 가까운 에너지를 뽐냈던 배우 제이크 질렌할이 오랜만에 일상적인 모습으로, 그러나 지켜 보는 모든 이들이 느낄만한 꾹꾹 눌러담은 슬픔을 시리도록 표현해내며 이름값을 한다. 나오미 와츠 역시 화장기 없는 얼굴에 허름한 차림으로 캐런을 연기한다.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 빼빼 마른 몸에 헐렁하게 걸친 목 늘어난 티셔츠와 무릎 나온 트레이닝복 바지가, 오히려 배우로서의 나오미 와츠가 가진 가치를 더욱 빛낸다.
무서우리만큼 자신의 감정을 감춰왔던 데이비스가 그 안의 분노와 상실감에 솔직해지기 시작하는 건, 극 후반에 이르러서다. 미처 알지 못했던 아내의 비밀이 드러나고, 곪아왔던 장인장모와의 갈등이 터지며, 비로소 데이비스는 진작부터 했어야 할 애도의 감정과 직면한다. 진작에 눈물을 터뜨렸어야 할 데이비스가 먼길을 돌아 그제야 터지는 울음을 참지 못해 훌쩍이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를 안고 다독여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마음 속 상처가 함께 치유되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