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독서의 계절은 가을. 그러나 이제는 여름이다. 여름은 휴가의 계절로 시간 여유를 가장 많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갖고 휴가를 떠나는 '북캉스'(북+바캉스) 개념이다.
타운에 거주하는 직장인 김영민(40)씨는 올 여름 휴가는 책과 함께 보낼 계획이다. "해마다 가족과 함께 자동차 여행을 했는데 올해는 레저 시설이 있는 리조트로 가려고요.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수영 같은 레저를 하고 저는 책을 읽으려고요. 주변에서 부동산 투자 호기를 노리는 이들이 많다 보니 저도 뭔가 준비를 해야 될 것 같은데 그쪽으론 워낙 아는 게 없어서…. 경제가 돌아가는 원리를 기본적인 것은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읽을 책은 벌써 친구에게 추천을 받아놨습니다."
지금까지 한인들의 여행 스타일은 빡빡한 스케줄을 강행군으로 소화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다 보니 휴가를 갖다 오면 더 피곤한 경향이 있었다. 북캉스는 여유를 갖고 몸과 마음을 비우자는 여행의 성격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사업을 하는 이성준(46)씨는 아예 집에서 며칠 쉬면서 책을 읽기로 했다. 크진 않아도 작은 사업체를 안정권에 올려놨다고 자부했는데 최근엔 허탈한 기분을 자주 느끼는 이씨다. "마음을 다스리는 책을 읽고 싶어요. 앞만 보고 왔는데 앞뒤 돌아볼 여유가 필요하지 않나 해서요. 나보다 먼저 고민했던 사람들의 생각을 읽어보려고요."
여름은 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한글책을 읽으며 한국어 실력을 키우려는 부모부터 가볍게 재미로 책을 읽으려는 이들까지 독서의 계절이 됐다.
최보라 정음사 사장은 "6월말부터 8월까지의 여름시즌 판매량이 다른 계절과 비교할 때 30% 정도 많다"고 말한다. 단기간으로 따지면 선물용 책을 많이 사는 크리스마스 판매량이 가장 많지만 계절로 보면 여름철 판매가 많아 직원도 더 많이 배치한다. 오히려 봄과 가을이 비수기라 할 수 있다.
여름 판매량 증가에 한 몫 하는 것은 LA에 관광온 타주와 중남미 한인들의 수요. "관광차 타운에 들렸다가 혹은 자바에 물건을 떼러 왔다가 책을 사가는 경우가 여름에 특히 많다"는 게 최 사장의 말이다.
미주 한국도서 공급업체인 오페스의 정건수 이사는 "선물용 매출이 많은 12~1월이 피크이고 7~8월 판매량이 그 다음으로 많다"고 집계했다.
겨울엔 선물용이, 여름엔 내가 읽을 책을 사는 경우가 많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겨울엔 선물용인 교양서가 많은 편이고 여름엔 부담이 덜한 소설이나 에세이 비중이 높다. 신학기를 앞둔 방학이라는 시기적 특성 때문에 교육관련 책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정이사는 “한인의 독서 경향이 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분석한다. “한국에서 폭발적 인기를 끈 ‘한국의 젊은 부자들’이 이곳에서 30위권에 들지 못한 것 같은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학습서를 제외하면 한인들의 독서 경향은 크게 외국소설 번역물과 인생을 바라보는 에세이, 경제경영 같은 실용서로 나타난다. 최사장은 “소설 부문에서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디셉션 포인트’ 같은 번역 소설이 여전히 강세”라고 설명했다. 대신 한국 소설은 가야나 고구려, 한반도 정세를 둘러싼 역사소설이 인기를 끌면서 새로운 추세를 만들고 있다. 일본 천황족과 가야제국의 연계성을 밝혀낸 최인호 소설 ‘제4의 제국’이나 북한을 흡수하려는 중국의 음모를 소재로 한 김진명의 ‘신의 죽음’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엽기 조선왕조실록’도 역사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여준다.
삶에 대한 성찰을 담은 책의 인기는 치열한 경쟁과 현기증 나는 변화 속도 속에서 삶을 돌아보고 싶은 심리의 반영으로 보인다. 소설가 공지영의 자기성찰 기록인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법정 스님의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고든 리빙스턴의 ‘너무 일찍 나이들어 버린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이 성찰의 책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다.
최고의 스테디 셀러로 꼽히는 ‘다빈치코드’와 ‘긍정의 힘’ 가운데 하향세를 보이는 ‘다빈치코드’와 달리 ‘긍정의 힘’이 식지 않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도 성찰에 대한 굶주림을 보여준다.
인간관계나 경제경영의 실용서 인기도 여전하다. 인간관계를 다룬 ‘끌리는 사람은 1%가 다르다’와 비즈니스 서적인 ‘마시멜로 이야기’가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다. 대표적인 실용서인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도 10위권을 벗어났지만 꾸준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한인들의 책구매는 꾸준히 늘고 있다. 정 이사는 “온라인 서점의 경우 99년 문을 연 이후 2003년까지 매년 2배 이상 증가세를 보였다”고 밝혔다. 오프라인 서점은 온라인보다 증가폭이 더 커 매장을 확장하고 있다. “지난 연말에 버지니아주에 서점을 열었을 때 반응이 너무 좋았습니다. 오프라인 서점으로 새로운 수요를 이끌어낼 수 있음을 확인했고 앞으로도 꾸준히 성장할 것으로 예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