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산행은 큰 굴곡이 없는 숲길이다. 오르내림이 별로 없는 길이다. 산행 목적지를 블랙 애시 마운틴(Black Ash Mt.)으로 잡았지만 이 산 근처의 숲길을 걷는다는 의미일 뿐 블랙애시마운틴의 봉우리를 오르는 코스도 아니다.
해리만스테이트파크(Harriman State Park) 남쪽 지역 세븐레이크드라이브(Seven Lakes Drive) 입구의 산봉우리 사이 계곡길을 한바퀴 도는 숲길 산행 코스다.
팰리세이즈인터스테이트파크웨이에서 이어지는 세븐레이크 드라이브는 허드슨강으로 연결되는 코스와 함께 뉴욕 근교에서 손꼽히는 연인들의 드라이브 코스로 이름이 높다. 울창한 숲길 속에 군데군데 호수의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기분 좋은 길로 젊은이들이 처음 차를 사서 연인을 태우고 달리고 싶어하는 첫 코스로 꼽힌다.
비 온 뒤 끝이라 청명한 날씨여서 나뭇잎에 부딪힌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눈부시다. 빗물에 씻긴 공기는 맑다 못해 풋풋한 향내가 난다. 지난 여름 이 길이 무척이나 길고 지루했나 싶었는데 날씨가 바뀌니 발걸음마저 가볍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같은 산 같은 코스도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이렇게 느낌이 다른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도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런 까닭에 아무리 오르내려도 지루하지 않은 것이 산행이다.
바람소리가 서걱거리고 웃자란 수풀 끝이 벌써 노랗게 익어가는 것이 어느덧 가을이다. 햇살에도 가을의 기운이 서려 있다. 봄이 벌판에서 먼저 시작되듯 가을은 산에서 시작해 벌판으로 내려오는 법이다. 따라서 가을을 먼저 즐기려면 산으로 가야 한다.
절기는 어느덧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는 백로.추분을 지나 추석이 가깝다. 하늘과 땅의 모든 기운이 시들고 마르기 시작하는 때가 된 것이다. 시들고 마른다고 슬퍼할 것은 없다. 시들고 말라야만 결실을 거둘 수 있는 법이다. 결실은 또 생명의 탄생을 그 속에 예비하는 것이니 만큼. 그것이 순환하는 세상의 이치인 것이다.
산행 시작은 파킹장 들어오는 입구 다리 아래 임도(林道)에서 시작한다. 입구는 차량통행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트가 설치돼 있고 트레일마크는 블루가 동그란 점으로 찍힌 모양이다. 이름하여 '블루디스크트레일(Blue Disc Trail)'. 30여분 오르면 첫번째 뷰 포인트가 있다. 수직으로 깍아지른 듯한 큰 바위 위에서 주변 숲을 바라볼 수 있다.
정상에서 한 숨 돌리고 40여분 걷다보면 레드 마크 트레일을 만난다. 암벽에 'TMI(Tuxedo MT Ivy)트레일' 이름이 쓰여있다. 우리는 블루마크를 따라 직진한다. 바위 위에 올라서면 2번째 뷰 포인트다. 클라디우스 스미스 덴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바위 덩어리다. 사방은 아니지만 최소한 앞과 좌우 3면은 툭 트여 전망이 훌륭하다.
30분쯤 더 걷다보면 오른편에 스웜프(습지)를 만난다. 키 큰 갈대숲이 나무숲 사이에 은빛으로 펼쳐져 있다. 이 습지가 블랙애시스웜프(Black Ash Swamp)다. 비가 온 다음날이라 그런지 습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폭포를 이뤄 떨어진다. 트레일은 폭포 위를 지나 건너편으로 이어진다. 내를 건너면 블루 트레일과 레드 트레일이 교차하는 지점이다(이 지점에서 길을 잃기 쉽다. 지도를 지참하는 것이 좋다).
같은 블루라도 마크 표시가 다르다. 여기서부터 블루가 점으로 찍힌 마크를 버리고 네모 바탕에 블루표시(√) 따라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 트레일이 '빅토리(Victory) 트레일'이다. 길은 비포장 임도 같은 모양이다. 넓고 평탄한 숲길이 호수가 보일 때까지 1마일 가량 이어진다.
간밤에 비바람이 몹시 불었던 모양이다. 굵은 도토리가 지천이다. 몇 분만 주워 모아도 금방 한 자루가 될 것 같다. 그냥 지나치기가 서운할 만큼 굵고 실한 도토리가 바다 건너 고향에 대한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에도 참나무가 참 많다. 한국인들의 참나무에 한 사랑과 애착은 유별나다. 오죽하면 이름마저 '참나무'라 지었을까. 참나무만 진짜 나무라고 생각했다. 갈참나무부터 졸참나무 신갈 떡갈 상수리나무 등등이 모두 참나무 종류들이다. 영어로는 Oak로 불리는데 재목이 단단하고 무늬가 아름다워 고급 가구를 만드는데 쓰인다. 그 참나무의 열매인 견과류를 통칭 도토리(acorn)로 부른다. 그 도토리를 갈아 만든 쌉쌀하고 고소한 도토리묵에 대한 미각이 되살아나 저절로 입속에 침이 고인다.
임도가 이어진 곳에 호수가 있다. 세븐레이크 중 하나인 레이크 스캐논토(Lake Skenonto)다. 호숫가 전망 좋은 곳을 잡아 점심을 해결해도 좋다. 잠시 쉬어 가기에는 너무 아까운 경관이기 때문이다. 그리 크지 않은 호수 면적에 길게 드리워진 섬 하나가 일본식 정원을 통째로 옮겨놓은 것 같다. 툭 트여진 호수 경관에 비딱하게 비켜선 나무 하나가 남국의 야자나무를 닮았다.
해는 벌써 중천을 넘어 눈 앞으로 내려서려 하고 있는데 그런 배경으로 한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잔 물결이 차례로 일어서며 수면이 고기비늘처럼 반짝인다. 아무리 처다봐도 지루하지 않은 풍경이다. 미인의 눈웃음을 왜 추파(秋波)라고 했는지 이해가 된다.
호수로 가기 직전에 세모 표시의 옐로 마크가 있다. 우리는 옐로를 따라가야 한다. 호수 가는 방향을 바라보고 우회전이다. 10여분 내려가면 또 하나의 호수가 있다. 레이크 세바고(Lake Sebago)는 규모가 그 전 것보다 크다 (호수를 바라보고 왼편으로 호수를 끼고 트레일 마크가 없는 언마크드 트레일을 1마일 가량 가면 비치가 있으며 이곳에서 물놀이를 즐길 수도 있다).
레이크 세바고 호수를 왼쪽에 끼고 오른쪽으로 30여분 걸어 화이트 바(White Bar) 마크를 만나면 좌회전 여기서부터는 화이트 바를 따라간다. 곧 이어 셸터를 만나고 여기서부터 30여분 더 내려가면 자동차가 달리는 큰 길까지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