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신문 지면마다 맨부커상을 탄 '채식주의자'로 들끓을 때 나는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샀다. 잠시 망설이긴 했었다.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책을 살 것인가 아니면 꼭 읽어보리라고 마음먹었던 책을 구입할 것인가. '생각보다 무지 얇네'라는 생각을 하며 결국 나는 1946년도에 발간된 책을 선택했다. 개선문의 한글 번역본은 제법 두꺼웠다. 본문만 617페이지였다. 며칠은 작정을 하고 읽어야 했다.
"소재가 특별하고 괴이하고 기분이 나빠서 머리까지 아파서 두통약을 먹었다"는 친척의 카톡 문자를 받은 건 서점을 다녀온 며칠 후였다. 연세가 일흔이 넘은 그분이 '채식주의자'를 읽었다는 배려는 뜻밖이었다. 나는 한국을 떠나기 전에 세심하게 수상에 관한 신문기사까지 챙겨 넣은 그 책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그 두 권의 책을 미국에 돌아와서 다 읽었다.
두 책을 비교한다는 게 어불성설이다. 다만 나는 같은 시점에 두 권의 책을 읽게 됐고 동시에 두 책이 주는 무게감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취향, 내가 추구하는 작품세계를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폄훼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처제와 형부를 둘러싼 기이한 두 가족의 성적 취향을 그려낸 소재는 읽는 내내 불쾌했고 덮어버리고 싶었다. 솔직히 나는.
자신을 고문했던 게쉬타포 하케를 죽이기까지 사랑마저도 절제해야 했던 '개선문'의 주인공 외과의사 라비크도 숱한 여자들과 하룻밤을 보낸다. 하지만 그에게선 차라리 연민이 느껴졌다. 작가가 좇는 것은 성에 대한 탐닉이 아니라 전쟁의 희생자가 되어도 도망자로 살아야 하는 이민자의 생존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3번째로 권위 있다는 상의 수상 소식이 전해진 그 시점이 새벽에 강남역 부근에서 23살의 여자가 느닷없는 죽음을 맞이했을 때였다. 산에 올라가던 50대 여자가 불귀의 객이 된 게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즈음에 5년 전 중학교 때 22명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성폭행을 당한 여자의 안쓰러운 침묵 때문이기도 했다.
처제의 엉덩이에 난 몽고반점에 성적 흥분을 느끼는 형부의 성도착증적인 심리묘사를 그려낸 작가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것 때문이었으리라.
한글을 영어로 번역을 얼마나 잘 했는지 영문판을 읽지 못했으니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설사 영어로 읽는다해도 내 영어실력으로는 평가불능이다. 그래도 듣도 보도 못한 상과 상금을 탔다고, 죽어가는 출판시장을 그나마 살렸다고 해서 손을 들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작가마다의 자신의 문체와 세계가 다를 뿐이라고 여기면 그뿐이다.
하지만 둘러보면 마음을 둘 곳이 없는 세상이다. 엽기적이지 않으면 관심조차 안 갖는 세태가 됐다. 가학적인 세상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가슴 졸이는 일인지. 세상이 갑자기 불쌍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