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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엽 기자의 미국 대륙기행] 웨스트 버지니아, 존 덴버가 노래한 그 고향 그 시골길

Los Angeles

2006.12.14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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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보싱 화장지처럼 온통 산으로 뒤덮혀, 석탄 집중 생산…주 수입의 60% 차지
'동가식서가숙'에 탄력이 붙었다. 방랑자 홈리스형 여행자로 기본 틀이 잡혀가고 있는 것이다.

먹는 것이 특히 그렇다. 10월 초순 어느 날인가는 웨스트 버지니아 찰스턴의 한 공원에서 저녁으로 삶은 달걀 9개를 한자리에서 해치웠다.

"반찬 투정은 배불러서 하는 것"이라는 생전의 할머니 말씀을 실감한다. 할머니는 인정 넘치고 따뜻한 분이었지만 반찬 타박만큼은 그냥 넘기지 않았다. 큰 아버지가 됐어야 할 분들을 굶겨서 떠나 보냈으니 오죽했을까.

떠돌이 생활에서 식사는 좀 과장하면 삶과 죽음의 문제다. 한국 음식 미국 음식을 가리는 것은 사치다. 배가 고프면 무엇이든 먹게 된다. 9월 초순부터 말까지 3주 가까이 거의 햄버거 집 신세만 진적도 있다.

몇끼씩 연속해서 미국식 패스트푸드를 먹는 것은 고역이다. 그러나 그것은 햄버거 가게에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의 감상이다. 일단 한 입 베어물고 나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매끼 잘 먹는데 요령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과식을 하지 않는다. 배가 쉬 비니 때만 되면 식욕이 왕성해진다.

또 달걀을 9개씩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배가 고팠던 데다 달걀에 잼을 바르는 퓨전식 발상이 한 몫을 했다. 삶은 달걀을 소금에만 찍어 먹으라는 법은 없다. 패스트푸드 점에서 얻은 달착지근한 포도잼 딸기잼을 발라 먹다보니 대여섯개는 먹는 줄도 모르고 먹었다.

야채 섭취가 부족하다 싶으면 수퍼마켓에서 씻어 비닐 봉지에 넣은 야채를 사 먹는다. 처음에는 랜치 소스 같은 것을 뿌려 먹었지만 나중에는 귀찮아서 그냥 우걱우걱 한봉지씩 해치웠다.

달포 정도 이런 식으로 살아온 탓일까. 행동거지에 알게 모르게 홈리스 티가 났던 모양이다. 10월 초순 여행에 나선 후 처음으로 필라델피아의 한 고등학교 친구집에서 이틀을 묶고 다시 여정을 시작할 때였다.

차에 막 올라타는데 친구의 아내가 친구에게 뭐라고 속삭인다. 내가 친구에게 "무슨 말인지 나도 좀 알자"고 하니까 친구 왈 "아이 엄마가 돈을 좀 쥐어 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2박3일 동안 그토록 잘 먹여주고 재워주고 나서도 내가 여전히 안돼 보였던 걸까. 내 딴에는 나름대로 품위 관리를 했는데 그럼에도 행색을 속일 순 없었던 모양이다.

"홈리스도 자존심이 있고 원칙이 있다"며 돈 얘기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그런 한편으로 친구 가족의 마음 씀씀이가 한없이 고마웠다.

친구 집에서 이틀은 여독을 푸는데 큰 도움을 줬다. 친구와 테니스도 치고 오랜 동안 못다한 얘기 꽃도 피웠다. TV도 시청했다. 원시사회에서 잠깐이나마 문명 세계로 복귀한 느낌을 갖기에 충분했다.

오리지널 홈리스라면 누릴 수 없는 호사를 맛봤다. 하지만 식구 다섯의 단란한 친구 집은 결과적으로는 정신적 '해독'으로 작용했다. 친구 집은 전형적인 스위트홈이었는데 이런 가족들의 생활을 곁에서 지켜 보니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아이들과 아이 엄마가 문득 무척이나 그리워진다.

마음이 이런 식으로 약해지면 자동차의 가속 페달 밟기만 어려워질 뿐이다.

떠돌이 생활에서 가정으로 복귀는 쉽다. 그러나 그 반대는 간단치 않은 일임을 친구 집에서 이틀을 묶고 나오면서 절감했다.

웨스트 버지니아에는 친구 집 방문에 따른 '후유증' 때문에 무거운 마음으로 들어섰다.

웨스트 버지니아 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의 첫 밤은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 비까지 겹쳐져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 신세라는 게 유달리 처량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웨스트 버지니아는 산으로 유명한 곳이다. 미국 최고의 컨트리송 가수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존 덴버의 노래는 웨스트 버지니아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고향으로 날 보내줘 고향 그 시골 길(Take me home country roads).' 지금은 고인이 된 존의 첫 히트곡이다. 미국 산촌의 아름다움을 이 보다 더 잘 표현한 노래도 없을 것이다. 첫 구절 부터 정감이 가득하다.

"Almost heaven west virginia (거의 천국같은 웨스트 버지니아)/ Blue ridge mountains (푸른 등성이 산들)/ Shenandoah river (셰넌도어 강)/ Life is old there (그 곳에는 옛날식 삶이 있어)/ Older than the trees (나무들 보다 더 오래된 그런 삶)/ Younger than the mountains (하지만 산보다는 젊은 삶이지) / Growin like a breeze (산들바람처럼 컸어)."

아닌게 아니라 잠에서 깨어나 이튿날 79번 주간 고속도로를 타고 남하하는데 산 빼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전날에는 밤중에 메릴랜드를 거쳐 웨스트 버지니아에 진입하는 바람에 지형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크고 작은 산들이 얼마나 빼곡한지 개다리 소반 하나를 수평으로 세울만한 평지가 없을 정도였다. 79번 주간 고속도로를 타고 주도인 찰스턴까지 200마일 가까이를 달렸는데 풋볼장 너댓개 만한 넓이의 평지조차 구경하지 못했다. 고속도로 자체도 2마일 이상 반듯한 구간이 없었다. 구배와 경사의 연속이다.

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징그러울 정도였다. 그나마 큰 산도 거의 없고 그만그만한 크기의 '동네급' 산들이 마치 엠보싱 화장지의 표면처럼 울쑥불쑥 지표면을 덮고 있는 형국이다. 크기가 여의도 만한 거인의 손바닥으로 한번 쓱 훑으면 얼마나 울둘투둘한지 실감이 날 것 같다. 79번 고속도로는 우리 식으로 치면 경부고속도로다. 웨스트 버지니아에는 또 하나의 간선 고속도로가 있는데 호남고속도로 격인 77번이다.

산촌의 아름다움 '와일드 & 원더풀'

79번 고속도로는 우리 식으로 치면 경부고속도로다. 웨스트 버지니아에는 또 하나의 간선 고속도로가 있는데 호남고속도로 격인 77번이다. 두 도로는 ‘ㅅ’자 모양으로 교차한다. 77번 고속도로 주변도 79번과 마찬가지로 산, 산, 산, 산 뿐이다.

웨스트 버지니아가 자랑하는 슬로건 ‘와일드 앤드 원더풀’이 실감난다. 한데 와일드도 좋고, 원더풀도 좋은데 주 전체가 온통 산으로 뒤덮이다시피한 이 곳 사람들의 ‘끼니’가 궁금해진다. 뭘 먹고 살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을 떠돌이 만큼 절절하게 느끼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세상에 좋은 경치는 두루 보는데 그 것도 어디까지나 배고프기 전의 일이다.
아닌게 아니라 찬찬히 훑어보니 주 전체에 궁끼가 흐른다. 가구당 평균 소득이 50개주 가운데 꼴찌라는 사실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주도인 찰스턴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도시는 낡디 낡았고 시골은 빈 집이 수두룩했다.

인접한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주의 가구 소득은 지난해 기준으로 각각 5만7000달러, 5만35000달러선으로 추정된다. 웨스트 버지니아는 3만3000달러정도니까 절반을 조금 넘는 선이다.
그나마 웨스트 버지니아가 하나의 주로 존립하는데는 19세기형 산업으로 치부되는 석탄 광산 덕이 절대적이다. 이 곳에서 종종 터지는 탄광 사고로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석탄 산업의 비중이 그렇게 큰지는 미처 몰랐다.

웨스트 버지니아의 석탄 산업은 주 수입의 60%를 떠받치고 있다. 한마디로 탄광이 문을 닫는다면 웨스트 버지니아는 하루 아침에 중진국은 커녕 후진국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 자명하다.
석탄은 주 최남단의 맥도웰 카운티와 인근 지역에서 집중 생산된다. 맥도웰 카운티의 한 소형 광산 매니저인 랜디 캠벨(45)은 “집안 대대로 광산 일을 해왔다. 석탄 캐는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탄부로서는 고참급인 랜디의 연봉은 10만달러 가량이다. 초짜 탄부도 조금만 경력을 쌓으면 대부분 시간당 20달러가 넘는다. 산골 생활비를 기준으로 한다면 크게 부족하지 않은 금액이다.

랜디는 웨스트 버지니아를 더없이 아름다운 땅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웨스트 버지니아를 떠날 생각도 없다고 했다. 탄광 산업이 사양 고개를 넘어 쇠락 산업인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존자원으로 석탄의 가치는 인정해줘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랜디 같이 석탄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제외하곤, 도시건 시골이건 할 것 없이 거리에서 마주친 대다수 사람들의 얼굴은 활력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지친 표정이 일상화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드물지 않았다. 지난 30~40년 사이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다 떠나고, 궁핍한 산 골짜기 생활에 나름대로 적응한 이들만이 웨스트 버지니아를 지키고 있는 느낌이었다.

▶웨스트 버지니아는
뉴욕보다 더 날렸던 시절 있었네


웨스트 버지니아의 이름난 탄광은 남쪽, 버지니아 주와 경계 부근에 몰려 있다. 석탄 산업은 예나 지금이나 웨스트 버지니아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석탄 산업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1960년대. 남부 맥도웰 카운티의 블루필드(Bluefield)는 뉴욕과 시카고에 버금가는 영화를 자랑했다.

당시 리틀 뉴욕으로 불렸던 이 도시는 오후 5시면 길로 쏟아져 나온 퇴근 차량으로 혼잡이 극에 달했다. 가구당 차 소유 댓수가 미국내 으뜸이었으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뉴욕보다 앞서, 세계에서 출퇴근 러시아워가 가장 먼저 시작된 도시로 부러움 아닌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또 블루필드 외곽의 브람웰(Bramwell)은 미국내에서 백만장자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도시로 이름이 높았다. 주 경계선 건너의 버지니아 그레이엄시는 블루필드를 닮고 싶었던 까닭에 투표를 통해 시 이름을 블루필드로 바꾸기도 했다. 블루필드의 영화가 짝퉁 도시를 만든 것이다.

밤이면 블루필드는 미국에서 물이 가장 좋은 환락의 도시로 변했다. 시카고를 능가한다는 얘기가 당시 사교계에서는 정설로 통하기도 했다.
지금도 일부나마 당시의 영화를 짐작케할만 건물들이 시내 이 곳 저 곳에 반 폐허 상태로 남아있다. 화려한 밤 무대의 쇼가 펼쳐졌을 법한 공연장, 관람 인파가 우글댔을 영화관, 흥청망청 술잔이 오갔을 나이트 클럽 등의 벽돌 건물이 석탄을 실어 날랐던 철로를 따라 흉칙하게 늘어서 있다.

시내는 물론 주택가도 버려진 집들이 절반이 넘는 것처럼 보였다. 유령 도시가 따로 없다. 웨스트 버지니아 사람들에게 지난 30~40년은 말 그대로 격변의 세월일 수 밖에 없었다.
석탄 산업이 불러온 영화는 이제 흔적으로만 남았다. 그러나 여전히 석탄 산업은 웨스트 버지니아를 하나로 묶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거의 유일한 부의 원천인 석탄 광산마저 문을 닫는다면 그렇잖아도 개성이 제각각인 웨스트 버지니아 사람들을 묶어줄 끈은 더 이상 없는 셈이다.

웨스트 버지니아는 남한의 3분의 2만한 크기다. 한데 한국의 영호남, 중부권 정서는 저리가라 할만큼 지역별로 개성이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
메릴랜드와 맞닿은 북동부 팬핸들 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을 수도권 사람으로 생각한다. 워싱턴과 거리가 차로 1시간 안팎인 지역이다. 말투도 메릴랜드나 워싱턴DC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공화당 쪽에 표가 쏠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가 하면 북서부 팬핸들은 펜실베이니와 오하이오 사이를 깊숙히 파고들고 있다. 목초지가 다소나마 있는 이 지역 사람들은 스스로를 미드 웨스트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민주, 공화 지지 성향이 엇비슷하다.
석탄지대인 남부와 남서부는 테네시나 노스 캐롤라이나와 사람들과 말투가 똑 같다. 그러나 석탄산업을 중심으로 노조의 입김이 컸던 탓에 정치성향은 주변 지역과는 달리 민주당쪽이다.

웨스트 버지니아에는 또 리딩 시티가 없다. 인구 5만이 약간 넘는 주도인 찰스턴과 비슷한 규모의 도시들이 너댓곳에 산재해 있다. 찰스턴을 제외하곤 그나마 대부분 타주와 경계선상에 있다. 도시들이 할거하고 있는 것은 주 전체가 온통 산 뿐인 지형의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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