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는 어느덧 덜레스 공항 상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8명의 의사들-김대용, 권오기, 김성구, 백웅기, 서진호, 추교웅, 최종우, 김익재-은 막은 이미 오르고 있는데 미처 대사를 다 못 외워 당황해하는 학교 연극 배우들처럼 페루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사람들을 보게 될지,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약간의 불안감과 흥분감 그리고 일상에서의 탈출이 주는 안도감이 교차되는 가운데 페루로 향했다.
휴스턴에서 갈아탄 리마행 비행기에는 페루사람들로 보이는 여행객들이 많이 있었다. 마침 옆에는 50대 중반 내지 60대로 보이는 페루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다. 영어를 잘 못해서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가족들이 다 페루에 있고 자기는 혼자 미국에서 청소 등 힘든 일을 하며 일년에 한번 페루의 가족을 보러 간다고 했다. 웬지 주변의 한국 사람들 사연을 듣는 것 같아서 친밀감이 들었다.
난생 처음 내린 리마 공항은 마치 1960년대 말 김포공항을 연상시켰다. 사람들은 착해 보였고 숙박지로 향하는 새벽 차창을 통해서 비쳐진 길거리 건물들은 어딘지 생소했다. 별로 길지 않은 일정이지만 그래도 페루까지 왔으니 마추피추를 보고 가야겠기에 한 2시간 눈을 부치고 마추피추 인근에 있는 쿠스코라는 도시로 가기 위해 다시 비행기를 갈아탔다.
쿠스코는 약 해발 3000m 정도의 높이에 위치해 있는 도시다. 그곳에서 마추피추행 기차로 갈아타려면 소형 버스에 몸을 실고 1시간 반 정도 우루밤바로 가야 했다. 우루밤바에서 버스를 내리니 말이 기차역이지 기차역 건물은 아예 없었다. 대신 인근에서 기념품을 팔고있던 아낙네와 아이들만 우리 주위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기차를 타고 2시간을 달려 마추피추의 산자락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한국의 지리산 어디쯤에 와 있는 정도의 느낌 밖에는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일행을 태운 버스가 깍아지른 듯한 산을 나선형으로 올라가면서 서서히 경외감으로 바뀌어 갔다. 사방에 마구 삐죽삐죽 솟아오른 거대한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한 만년설은 신비롭기만 했다.
마추피추 정상에 올라보니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소름끼치듯 몰려 왔다.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을 눈으로 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정도 비유로는 너무 미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5세기에 존재했다는 마추피추의 잉카 문명은 여러 잉카문명의 유적지 중에서도 가장 크고 가장 신비한 유적지로 알려져 있는데 1911년경에나 발견됐다고 한다. 약 400년 동안 인간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 재해와 동물에 의해 손상이 가해졌지만 아직 너무나 뚜렷하게 잉카 문명을 말없이 웅변하고 있었다. 너무 흥분한 탓일까? 아니면 코카차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일까? 평소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겁도 없이 해발 3500m에 위치해 있는 잉카 유적지의 돌 위에 서서 하잘 것 없는 인간세상을 내려다 보며 일종의 초월감을 잠시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너무나 눈부셔서 더 이상 쳐다볼 수 없는 마추피추를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속에 묻은 채 털털거리는 버스에 초라하게 몸을 싣고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리마 외곽에 위치한 꽃동네로 가기 위해 산을 내려왔다.
페루 의사 두 명과 현지에서 선교를 하시는 김 목사님 부부 그리고 김 목사님 부부와 함께 사역하는 페루인들과 리마 외곽 목적지로 향했다. 꽃동네에 들어서니 다닥다닥 둘러붙은 판자집들이 정확하게 1960년대나 70년대 초반 한국 꽃동네를 연상시켰다. 뿌연 사막 먼지 속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은 천진난만했고 어른들도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순진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준비해간 물품과 약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8~9세 아이들이 4~5세 정도의 체격밖에는 안 되어 보였다. 아마 제대로 먹지를 못 해서 그럴 것으로 짐작됐다.
일가족 6명, 엄마와 올망졸망한 다섯 아이를 보게 됐는데 알고 보니 모두 친자식은 아니고 그 중에 2명은 입양했다고 한다. 찢어지게 가난하고 자기 아이들도 3명이나 있는데 그 두 아이의 부모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웃에 살던 자기가 입양을 했다는 얘기였다. 그 말을 들으면서 “아, 나는 누구인가” 한번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 우리는 페루 의사들에게 강의를 해주기 위해 리마에 있는 비교적 큰 병원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페루의사들로부터 그들의 연간 수입은 약 4천달러며, 800만이나 되는 리마 인구에 의대는 4개뿐이라는 말을 들었다. 또 페루는 전혀 약을 못 만들기 때문에 약은 전부 외국에서 수입(아르헨티나 또는 콜럼비아)되는데 약값이 너무 비싸 가난한 사람들은 약 살 엄두를 못 낸다고 한다. 의대를 졸업한 의사들은 레지던트 자리가 별로 없어 30%만이 레지던트 교육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병동을 가보니 커다란 강당 같은 방에 칸막이나 커튼도 없이 약 50개 정도의 녹슨 철제 침대가 놓여있었다. X-ray 필름은 환자의 침대 시트 밑에 끼워 놓는 식이었다. 미국 기준으로 보자면 너무 충격적이지만 그것이 페루 의료의 현실이었다.
김 목사님과 우리 이전에 이미 여러 번 방문하신 운열권 선생님이 같이 꾸며놓으신 진료소(Clinic)에 가보니 제법 규모가 갖추어져 있었다. 진료소 이름도 Polyclinico 페루ano Koreano로 되어 있어서 듣기도 좋고 보기도 좋았다. 한인 의사 협회 이름으로 김대용 회장이 5천달러를 클리닉에 기증하니 너무 좋아하고 감사해했다. 주는 사람도 기분 좋고 받는 사람도 기분이 좋다는 게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짧았지만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 페루를 뒤로 한 채 제2, 제3의 봉사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 보자고 다짐하며 우리는 페루 여행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