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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일 칼럼] 팔자 타령

New York

2006.12.22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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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평생 운수를 가리키는 말로 팔자(八字)가 있다. 사주팔자(四柱八字)에서 비롯한 개념이다.

사주팔자의 1차적 의미는 '태어난 해(年) 달(月) 일(日) 시간(時)의 네 간지(干支)가 되는 여덟 글자'지만 '운명적으로 타고 난'이란 의미로 널리 쓰인다. 그리고 발버둥쳐봐야 소용없다는 숙명성을 함축한있다. 신수(身數)도 유사한 뜻의 단어다.

'팔자 좋다' '팔자가 늘어지다'처럼 듣기 좋은 얘기도 없을 것이다. 비아냥이 아니라면-.

반면 '팔자가 사납다''팔자가 거세다' '팔자에 없다'는 것처럼 듣기 싫은 말이 또 있을까. 험한 운명을 타고 태어나서 기구한 운명이라서 하는 일마다 힘들고 되는 일은 없고 돼봤자 남좋은 일만 시키고 본인은 고생이나 지지리해야 하는….

'팔자를 고치다'는 말도 있다. 복권을 타는 등 뜻하지 않게 재물이나 행운을 얻은 경우나 재가가 엄격했던 시절에 과부가 새 서방을 얻는 등을 가리켰다. 그러나 변화로 생긴 새로운 처지 역시 '팔자'라고 치부되므로 결국 팔자는 인위적으론 어쩔 수 없는 게 된다. '고치다'로 숨통을 열어 준 듯하지만 그게 아닌 것이다.

웬 팔자 타령?

대통령의 좌충우돌로 한국민들의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님은 온나라가 난리를 겪고 있음은 다 아는 대목이다. 10%도 안되는 한심한 지지율은 딱한 국정 현실을 웅변한다. 세월이 좋아 그렇지 예전같았으면 최고책임자 자리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당사자는 통렬한 반성과 함께 국민에게 사죄하고 나머지 임기동안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청와대쪽에선 '성공한 대통령에 거부감을 갖느니' 어쩌니 하는 해괴한 소리나 들리고 어깃장만 더하는 모양새다. 엊그제 평통상임위에서의 연설은 막가파식 행태의 전형이었다. 외국인들이 볼까 걱정되는 어법이나 매너는 차치하고 자신의 허물이나 과오를 아예 외면한 채 일방적으로 상대를 몰아친 대통령이다. 뻔한 논리를 대단한 것처럼 풀어가는 대담함도 변함이 없었다. 또 이를 자신에게 편리한 대로만 활용하는 것은 차라리 '용기'에 가까왔다. 자신이 써먹은 총리.장관들까지 매도하는 등 소수 추종자 이외의 모두를 적대시하는 대목에선 많은 이들이 경악했다. 동포들까지 "우리나라가 어쩌다 이런 지경에"하는 탄식을 또할까 싶어 따로 내용 언급은 자제하지만… 대통령은 해도 너무했다.

지칠대로 지친 국민들은 이제 개전(改悛)의 정은 고사하고 그 와중에 정권재창출까지 넘보는 청와대와 여권 일각의 몰염치에도 별무 감각인 형국이다. 잇딴 대국민 협박조 행태나 기만에도 열을 올리지 않는다. 적반하장이니 우왕좌왕이니 하는 대정부 비판 용어들은 오히려 진부한 느낌마저 준다.

사태가 이쯤에 이르렀으니 한국의 처지를 묘사할 말로 '팔자'말고는 다른 무엇이 있을까 싶다. 팔자라는 게 조직이나 국가에도 통용될 수 있다면.

사실 팔자 소관이라고 밖에는 이해가 안되는 큰 사건들은 이미 여럿 있었으니 새삼스럽지도 않다.

대통령의 아들들과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되면서 지지율이 밑바닥을 헤맨 DJ정부의 정권재창출도 그중 하나다. 아무리 흑색선전을 동원해 상대방을 잘 음해했다손 치더라도 지지율 20%미만 정권의 재집권은 기현상 정도의 표현으론 설명이 안된다. 적잖은 국민들이 잠시 홀렸었나보다고 말하기도 그렇다. 대통령이 평통 연설에서 '굴러 들어온 놈' 운운한 것은 자신이 입양(入養)됐던 사실을 지칭하는 모양인데 어쨌거나 양자를 들이면서 지역분할 구도를 절묘하게 비집고 들어 갔다는 것으로도 납득이 안가기는 마찬가지다. 이 역시 나라 팔자가 그랬었다는 체념조 풀이로나 가능하다.

그리고 대충은 예상했던 바대로 그렇게 태어난 노정권은 자기의 지지자까지를 포함한 다수 국민의 속을 썩이는 중이다. 왕조시대의 제왕도 아니면서 이처럼 철저히 민의를 무시하는 국정을 멋대로 농하는 상황을 팔자이외의 다른 어떤 말로도 정의하기 어렵다.

여러 사람들을 더 심란하게 만드는 것은 '정가 괴담(怪談)'이라는 이름으로 떠도는 흉흉한 소문이다. 소문은 다음 대선에서 여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청와대의 계략과 관련해서다. 대통령이 야당후보가 확정되기 전 전격 하야 분열을 유도하는 동시에 국정 혼란 책임을 뒤짚어 씌워 여당후보 당선을 유도하거나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선거 며칠전 통일 논의를 위한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함으로써 일거에 국면 전환을 하는 방안 등등이 그 것들이다. 후보 마감일이 지난 뒤 야당후보를 제거할 가능성도 나도는 소문중의 하나다. 하나같이 섬뜩한 독기어린 방책들인데 원체 민심이반이 심화돼 '제2의 김대업' 정도로는 어림없다는 점을 절감하는 탓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지레 '박복(薄福)도 팔자'라는 개탄이 나오곤 한다. 그러나 미래를 얘기하는 이들은 거의가 대한민국 국운이 펴리라고 예언한다. 우여곡절을 겪되 잘 풀리다고 하니 다소 안도가 된다. 더 이상 희한한 지도자를 맞는 '돌출 상황'이 없다면 그만하기 다행이라고 자위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죽 답답하고 한심하면 우주를 여행하는 시대에 많은 이들이 뜬금없는 팔자 타령을 할까 싶다. 하기야 그렇게라도 해서 짜증과 우려를 덜 수만 있다면 고리타분한 팔자 타령도 나무랄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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