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의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다. 일제가 도로정비 이유로 대대로 내려온 전통 한옥을 헐었다. 어른들은 땅을 치며 통곡하는 가운데 인부들은 지붕과 토벽을 제거하고 목재 골격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때 현장을 감독하던 일본인 건축기사가 작업을 멈추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한참이나 가옥의 기본구조를 예술품 감상하듯 둘러보았다. "과연 백년을 견딜 만하다"고 감탄한 그는 가옥에 사과라도 하듯 고개를 숙였다 한다.
일본인 건축기사를 감탄케 한 것은 '막돌초석'이었다. 초석(밑돌)은 물론 기둥을 받치기 위해 땅에 박은 돌인데 막돌초석은 매끄럽고 모양있게 가공한 돌이 아니라 산에서 캐온 자연석 그대로다. 울퉁불퉁한 자연석위에 '그랭이질'로 아래면(面)이 불규칙해진 기둥을 세운 것이다.
막돌초석은 보기에는 엉거주춤하고 불안하다. 초석과 기둥이 일직선으로 맞닿지 않으니 기둥을 힘껏 밀면 빠져 나갈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돌초석 위의 기둥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세월이 가면서 굴곡진 두개 면은 자연스럽게 견고한 고정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매끄럽지 않아서 미끄러질 염려가 없다고 할까.
최근 한나라당 박근혜 전대표가 하버드대학 연설에서 "집권하면 100년을 지속할 한미동맹을 만들겠다"고 했다. 막돌초석의 슬기를 요구하는 선언이다.
지금까지 미국이 맺은 가장 성공적인 동맹은 영국과의 동맹이다. 그러나 '특별한 관계(Special Relationship)'로 불리는 이 동맹도 전혀 매끄럽지 못하다. 무엇보다 영국과 미국은 두 번의 전쟁을 치룬 사이이다.
1776년부터 8년을 끈 독립전쟁에서 영국은 2만의 생명과 당시 최대 식민지를 잃었다. 1812년 전쟁에서 영국은 분풀이라도 하듯 수도 워싱턴을 침공해 백악관과 의사당에 불을 질렀다. 만행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19세기 미국의 팽창주의자들은 주기적으로 영국령(嶺)인 캐나다를 탈환해야 한다며 전쟁을 부추겨 관계를 악화시켰다. 한편 이 시기에 영국은 중남미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인정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짐을 싸야 했다. 그 후 중남미에서 대영국제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은 가난하고 작은 섬 자마이카 정도이다.
20세기 들어 1.2차대전중 미국과 영국은 둘도 없는 혈맹이었지만 전쟁이 끝나면 어김없이 서로의 심기를 불편케 했다. 1차 대전 직후 미국은 고립주의(isolationist)정책을 폈고 이로 인해 영국은 독일 나치를 홀로 상대해야 했다. 힘에 부친 영국은 히틀러에 대해 유화책 (appeasement)을 쓰는 역사의 오점을 남기게 된다.
2차대전 후 미국은 영국의 입장에서 참으로 섭섭한 친구였다. 미국은 탈식민지화로 제3세계를 공산주의로부터 격리시키겠다며 자유주의 정책을 펴 팍스 브리타니카의 종말을 야기시켰다. 일례로 1956년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 한 이집트를 침공했으나 미국의 압력으로 울분을 삼키며 철수했고 이로서 중동에서 영국의 영향력은 종말을 맞게된다. 결국 1960년대 대영제국은 섬나라의 위치로 돌아갔다.
영국도 지지 않겠다는 듯 월남전으로 힘겨워 하는 미국을 향해 "노동당 정권은 백파이프 연주자 하나도 영국군에게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했다.
1980년대는 밀착에 가까운 레이건-대처정부의 공조시기였다. 그럼에도 레이건은 영(英)연방인 그라나다를 사전 통보 없이 침공해 영국인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다. 지금 영국과 미국은 이라크전쟁으로 인해 다시 혈맹이다. 그러나 이 또한 매끄럽지 못하다. 토니 블레어 총리가 올해 말로 사임을 선언한 이유는 그의 친미 정책에 대한 영국인들의 반감 때문이다.
이렇게 울퉁불퉁하고 굴곡이 심한 동맹이 어떻게 특별한 관계일 수 있을까. 답은 막돌초석에 있다. 두 나라 사이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동의(agree to disagree)가 있기 때문이다.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라는 큰 틀만 흔들지 않으면 약국간의 이견을 인정하는 존경과 여유가 있기 때문에 모든 사안을 매끄럽게 하려는 힘든 에너지 소비를 하지 않는다.
서로 다르게 생긴 모습을 받아들이니 사이가 돈독해진 아이러니가 바로 미.영의 특별한 관계이다. 백년을 가는 한.미동맹은 두 나라가 늘 허니문에 머무를 수 없다고 인정할 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