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4월 일라가 그녀의 친구 메리 맥코넬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메리의 오빠는 한국전쟁에서 사망했다. 일라가 건강한 모습으로 층계도 오르고 한층 젊어 보이니 현대 의학과 하느님의 치료의 손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일라가 18년을 도와주었는데 앞으로 30년 더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드렸다. 그때 나도 은퇴할 것이다.
얼마 후 일라는 미국의 집을 팔고 한국으로 와서 나와 함께 살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녀는 집 차 그리고 소유한 모든 재산을 정리한 모든 돈을 우리에게 기부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고아원 문을 닫고 정식으로 인가받은 고등학교를 함께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할 수 없이 16세 미만의 아이들은 다른 고아원으로 옮겼다. 80명 중 18명이 대학에 진학했고 그들 모두 졸업했다.
알프레드는 미국 정계에서 아시안 아메리칸으로서는 최고 높은 자리에 올랐다. 그는 코리안 아메리칸 최초로 캘리포니아 주 변호사가 됐으며 최초로 캘리포니아 주 하원의원 그리고 상원의원에 각각 당선됐다.
캘리포니아 민주당 코커스 위원장을 맡았고 아시안계로는 최초로 캘리포니아 주 기관장이 되었다.1982년 그는 영향력이 큰 캘리포니아 주 농업노동자 관계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한인 최초의 영자 신문 코리아타운위클리는 사진신부 출신인 알프레드 송의 어머니에 대해 특강과 인터뷰를 여러 번 부탁하기도 했다. 드디어 알프레드 송이 인터뷰에 응했다.
나의 아버지 송진구는 1900년 초 여섯살 때 부모님을 따라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왔다. 열여덟 살 때 겨우 6학년의 교육을 받고 사진신부와 결혼했다. 나는 1919년 장남으로 태어났고 나의 남동생은 13세 때 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1949년 남가주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어머니와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어머니는 "한국에 있는 전쟁고아들이 걱정되니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 버려진 전쟁고아들을 돌봐야 겠다"라고 말했다.
어머니에겐 돈이 거의 없었고 더구나 당시 60세의 고령이었다. 어머니는 여러 단체로부터 기부금을 부탁했으나 그녀가 너무 늙었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모든 단체가 기부를 거부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돈도 없이 홀로 한국으로 떠났다.
나는 어머니의 이러한 무리한 결정이 쓸데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한국에서도 가장 빈민가에서 진흙으로 건물을 세워 고아원을 설립했다.
내가 1967년에 어머니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아이들이 저녁 먹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아이들이 이런 곳에서 지낼 수 있죠? 무엇을 먹기에 아이들이 저렇게 초라해 보이나요?"
어머니는 꽁보리밥에 야채를 섞어 끓여 아이들에게 주고 있었다. 먹을 거라곤 매일 보리밥과 김치가 전부였다.
어머니가 어떻게 수년간 고아원을 운영해왔는지 알 수 없다. 어머니의 인생은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희생. 그리고 어머니는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다. 어머니는 사진신부로 하와이에 오자마자 일을 시작했고 집에서는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우리 모두 사탕수수밭에서 일했고 겨우 먹고 살았다. 아버지는 장남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어린 삼촌들도 돌봐야 했다. 아버지는 겨우 6학년까지만 학교에 다녔다. 어머니는 군대 근처의 양장점에서 바느질을 하면서 일감을 집에 가져와 밤늦게까지 집에서 바느질을 했다.
내가 자랄 때 대공황이 닥쳤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점심을 사먹을 수 있도록 매일 10센트씩 주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어머니가 운동화를 사주셨다. 당시 하와이에서는 모두 맨발로 다녔는데 나는 7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운동화를 가질 수 있었다.
어머니가 이런 고통을 다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아마 하느님에 대한 신앙심일 것이다. 어머니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었기에 자신이 한국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특히 어린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어머니가 활동적인 삶을 사실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생각된다. 어머니는 한 달에 한 번 소리 나는 대로 영어를 적어 나에게 편지를 쓰신다. 나는 어머니 아들이기에 어머니의 편지를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어머니는 교회를 다니라고 꾸짖으신다.
레슬리 송 위너는 미주 한인 최초의 민주당 집안 장녀로서 성장했다. 그녀의 아버지 알프레드 송은 몬터레이파크 시의원 로스앤젤레스 커미셔너 등을 역임했다. 그녀 역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두 달 전 하와이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할머니는 한국으로 가기 전까지 줄곧 우리와 함께 살았다. 할머니로부터 아주 따뜻함을 느꼈다. 나는 첫 번째 손녀였고 우리는 아주 특별한 할머니-손녀 관계였다. 할머니는 나에게 무척 큰 영향을 주셨다. 물론 그 당시에는 잘 몰랐어도 말이다.
할머니와 나는 아주 가까웠고 나는 할머니를 무척 사랑했다. 할머니는 따뜻하고 정이 많았는데 우리 어머니와는 달랐다. 할머니에게 하느님을 믿는 신앙생활은 매우 중요했다. 우리는 방을 함께 썼는데 어느 날 할머니가 나에게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었느냐고 물었던 것이 기억난다. 할머니는 나를 빌리 그레이엄 목사나 오럴 로버트 목사의 부흥회에 데리고 다녔다.
할머니는 선교사였으며 모든 활동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가정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할머니가 사진신부로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첫 모습에 몹시 실망했다.
반면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첫눈에 반했다. 할아버지는 장남이었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에 대학에 가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똑똑했지만 좌절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알코올중독자가 됐다. 두 분은 나중에 이혼을 했는데 할머니는 매우 힘든 삶을 살았다.
할머니는 항상 일을 했다. 아버지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하와이에서 가정부로 취직했고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봉제 공장에서 바느질을 했으며 나중에는 디자인을 해서 샘플을 만들기도 했다. 할머니가 한국에서 돌아왔을 때 우리 가족 모두가 모였던 것을 기억한다. 할머니는 이제는 한국으로 영원히 귀국해서 고아원을 설립할 것이라고 했다. 거리에 고아들이 많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고아원을 설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우리 가족들은 할머니가 돈 없이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라며 터무니없다고 할머니를 만류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할 수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종교 단체와 연결되어 기부금을 확보했고 아버지가 비영리단체 신청을 도왔다. 사람들이 이 단체에 기부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한국으로 떠난 후 우리의 생활에서 멀어져갔다.
지난 40년 동안 할머니는 단 두 번 미국을 방문했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이곳에 온 때는 1982년이었다. 할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 처음엔 편지를 했는데 나중에는 그나마도 끊겼다.
할머니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거리에서 아이들을 거두었다. 건물을 짓고 그 아이들을 데려다가 키웠다. 할머니는 미군에 가서 건물을 짓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성장하기 시작하자 고아원은 중학교가 되었고 할머니는 그곳에서 매일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할머니는 용감했다. 할머니는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해결했다. 그러한 할머니의 삶에 대해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할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기도에서 힘과 용기를 얻어 성스러운 종교적인 삶을 영위했다. 할머니는 하느님이 해결해주실 것을 진심으로 믿고 믿음대로 행동에 옮겼다. 나중에 할머니가 남긴 글을 읽으면서 나는 하느님의 영적인 힘이 할머니를 가서 행동하도록 이끌었다고 확신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