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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토스트 체인점

Chicago

2016.09.01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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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난 발명품들 100가지 이야기 – 우리도 부자가 될수 있다(78)
평범한 가정주부가 평범한 토스트로 대박이 나서 지금은 700여개의 가맹점을 둔 사장이 되었다. 더더구나 그 엄청난 체인점들을 광고나 마케팅 없이 오직 입소문으로 일궈냈다. 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는 '길거리' 토스트를 '명품' 토스트로 재탄생시킨 (주)이삭 (www.isaacs.co.kr) 김하경(53) 사장의 이야기이다.

김사장은 1995년 난생 처음 토스트 포장마차를 시작하기전까지 15년간 전업 주부로만 살았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발병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위해 길거리로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사장을 만나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세상에 이렇게 돈 욕심이 없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김사장은 말한다. "살면서 돈은 분명히 필요합니다. 돈이 있어야 생활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도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돈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어떤 사람은 다른 것에 가치를 두는데 저는 어떤 삶을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삭은 가맹비나 교육비를 단 한푼도 받지 않는다. '노력하지 않고 버는 돈은 돈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김 사장은 이것을 '불로소득''공짜'라고 믿기 때문이다.

"한 직원이 수련회 때 이런 말을 하데요. '우리도 가맹비를 1000만원만 받았어도 90억원인데 그 돈만 모았어도 서울 강남에 빌딩을 하나 살 수도 있었는데…'라고요. 그냥 웃었지요. 대신 '자긍심을 가져라. 비록 이삭이 작은 회사지만 어려운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한다'라고요." 고맙게도 직원들이 잘 이해한다고 했다.

김 사장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쳤어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공짜'의 연장선상이다. 일화 한토막. 김 사장이 청주에서 처음 장사를 할 때 인도에 포장마차를 차렸다. 인도였기에 그냥 영업만 하면 됐지만 포장마차 앞 건물주에게 전재산인 300만원을 보증금으로 주었다. 건물주는 황당했을 수 밖에.
김 사장은 "처음에는 학원에서 애들을 가르쳤지만 수입이 형편없었다"며 "토스트는 가끔 애들 간식으로 만들었는데 맛있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이다'라는 생각에 토스트 장사를 하게 됐다"라고 한다. 이때가 1995년 12월이었다. 6개월후에 보증금 500만원에 7㎡(약 2평)가게로 옮겨 아침 7시부터 새벽 1시까지 영업했다. "문을 열려면 학생들이 줄을 서 있는 거예요. 정말 쉴틈없을 정도였는데 보통 하루 매출이 200만원이 넘었었죠." 1분당 토스트 한 개 이상을 판 셈이다.
 
이삭토스트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김 사장은 "토스트 들어가는 재료는 식빵•캐첩•계란•햄•치즈 등 다른 집과 비슷했다. 그러나 나는 1200원짜리 토스트 한개를 만들더라도 정말 제일 좋은 재료만 골라 사용했다"고 털어 놓았다.
 
김 사장은 2003년 6월께, 40대 초반의 부부를 보면서 팔자에도 없던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게 됐다. "매일 아파트 입구에 좌판을 깔아놓고 남편은 우유를, 부인은 엑세서리를 파는데 수입은 변변치 않더군요. 내가 포장마차를 해봐서 아는데 장사라는 것이 참 힘들거든요. 잠이 안왔어요. '혹시 나처럼 토스트 장사를 하면 일어설 수 있지 않을까'생각했죠."

김 사장은 아무 관계도 없는 이 부부에게 보증금 8000만원에 30㎡(약10평)짜리 가게를 얻어주며 토스트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이름이 필요하다고 해서 '이삭'이라고 지었다. 3년만이지만 맛은 변하지 않았다.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 전국으로 퍼졌다. 갖가지 사연을 들고와 도움의 손길을 요청해오는 사람들에게 토스트 기술을 전수해줬다. 서울에 25개 등 약 2개월만에 전국 각지에 토스트 가게가 50여개를 넘었다. 말 그대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빵을 준 것이 아니라 빵 만드는 기술을 제공해 준 것'이었다.

문제가 생겼다. 이삭이라는 상표로 여기저기서 영업하는데 토스트 가격은 천차만별이었다. 받아 쓰는 재료 값에 따라 판매 가격에 차이가 생긴 것. "공동의 이익을 창출하는 방법이 없을까라고 고민했죠. 직접 재료를 구입해서 같은 가격에 공급하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가게마다 전화해서 50여가지 재료의 가격을 알아본 후 가장 싼 공장을 찾아가서 직거래 계약을 맺었다. 창고가 필요해서 돈을 빌려 대전 판암동에 3개를 빌렸다. 또 운전 기사들이 대전까지 오는 것이 힘들어 보이기에 경기도 하남에 수도권 물류창고를, 경남 함양에는 남부 물류 창고를 얻었다. 2004년 8월에야 브니엘이라는 물류 회사를 만들었다. 본격적인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1년전만 해도 프랜차이즈의 'F'자도 모르던 김 사장이었다.

김 사장은 "지금처럼 사람을 살리는 일, 어려운 사람과 더불어 함께 살 수 있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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