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즐겨보는 한국 TV 프로가 두 개 있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과 드라마 '하얀거탑'이다. 둘 다 꽤나 많은 마니아층을 거느리며 적지 않은 인기를 끌고 있는 화제작들이다.
전자는 근래 보기 드물게 3대가 모여 사는 한 집안의 일상을 코믹하고 재치 넘치게 그려내 폭소를 주고 있고 후자는 대학병원이라는 거대 조직을 둘러싼 치열한 권력 다툼에 매스를 대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감을 경험하게 해 준다.
기획 의도나 시청자들에게 주는 카타르시스의 종류는 서로 영 딴판이지만 두 작품은 모두 '생생한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다소간의 과장은 있을지언정 정말 옆집 어디에선가 살고 있을 법한 실수투성이의 필부필녀들 혹은 진절머리 날 정도로 세상물정에 도통한 수완가들이 그 안에 살아 있어 흥미진진하다.
물론 '하이킥'의 나문희 이순재 '하얀거탑'의 이정길 김창완 변희봉 등 '인간문화재'급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 덕에 두 작품의 캐릭터들은 더욱 팔팔한 리얼리티를 자랑하는 듯 하다.
재미있는 것은 이 생생한 캐릭터들이 지니는 생명력 탓에 두 작품 모두에서 '악역'에 가까운 인물들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점이다. 심정적으로는 얄밉고 미움받아야 마땅한 인물들이 오히려 더 큰 지지와 동감을 얻어 내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이킥'의 공인 '싹퉁바가지' 박해미는 시어머니의 말을 예사로 끊어먹고 잘난척을 있는 대로 하며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붙잡고 가르치려 들고 시동생의 사생활까지 사사건건 참견하는 못돼먹은 며느리다. '하얀거탑'의 장준혁은 이보다도 한 수 위다. 야망을 향해선 권모술수 거짓증언 그 어떤 것도 서슴치 않고 자신의 성공에 장애되는 것들은 가차없이 내치는 잔인한 인물이다.
그런데도 시청자들은 그들의 편에 서 이 '악역'들에게 열광한다.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이라는 것이다.
그들을 예의없고 재수없고 잔인하고 표독스럽다 하기 보다 똑부러지고 카리스마 넘치고 리더십이 있으며 삶에 대한 열정이 있는 인물들이라 칭송한다. 그들을 이해하고 심지어 닮고 싶어 한다. 악역을 맡은 배우를 보면 버선 바람으로 뛰쳐나와 '에이그 못된 년'하고 소금을 뿌려대던 시청자들의 정서는 이제 찾아보기조차 힘들다.
박해미와 장준혁에 열광하는 시청자들을 보며 조금은 쓸쓸한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읽는다. 어쩌면 TV앞의 우리는 조직의 권력 앞에선 무기력하고 이리 치이고 저리 채여 해야 할 말 조차 하지 못하고 능력없는 리더 노릇에 지쳐 허덕이고 있거나 야망을 잃어 생기없이 시들시들 살아 가고 있지는 않은지. 잘 나가는 한의사 수술의 천재인 외과의사 처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신만의 능력과 자신감으로 무장해 멋지게 세상과 부딪혀 보는 게 답답한 일상 속에 갇혀 있는 우리가 꿈꾸는 삶은 아닐른지.
갑자기 더워진 날씨로 불쾌지수까지 올라버린 듯 한 오늘 TV 앞에서 가만히 중얼거려 본다. 박해미 처럼 '오오케이~'라고. 장준혁처럼 '내 수술은 완벽했어'라고. 그들처럼 능력과 자신감으로 무장할 수 있다면 한번쯤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이 돼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