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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에세이]피니어스 게이지 이야기(II)

San Francisco

2007.05.15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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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석(정신과 전문의)
쇠막대기가 두뇌를 관통한 사고를 당한 다음 해인 1849년 피니어스는 충분히 기력을 회복하여 철도를 부설하는 일터로 돌아갔다.
그는 사고로 인해 언어나 운동에 손상을 받지 않았다.
기억력도 그대로 남아 있었고 체력도 차차 원상태로 돌아갔다.
주치의는 개이지가 운이 좋아서 두뇌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분만을 다쳤을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크게 변해 있었다.
친한 친구들조차 알아보기 힘든 변화였다.
그래서 그들은 “게이지는 더 이상 게이지가 아니야”라고 말했다.
항상 조심성이 있고 겸손했던 그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인간으로 변했고 입에서는 자주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주치의는 “게이지가 이성적인 기능과 동물적인 본능 사이의 균형을 상실했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예절이 바르지 못했고 떠벌리고 과장하는 습관도 생겼다.
전에는 정력적이고 침착하게 일을 하던 버릇 대신 무절제하고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미리 생각지 않고 행동하는 일이 많았으며 자신의 이익에 반한 선택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주치의가 아무리 타이르고 거듭 주의를 주었어도 게이지의 행동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의 행동이 너무 변덕스럽고 거칠어지자 그는 직장에서 해직을 당했다.
어떤 신체적인 장애 때문이 아니라 거친 성격 변화로 인해 직업을 잃은 것이다.

그 후 그의 생활은 뜨내기 인생에 불과했다.
머리에 쇠막대기가 관통한 사나이란 유명세로 해서 그는 곡마단이나 박람회에 전시되어 관객에게 관심을 끌었던가 하면 남미의 칠레에 가서 마차꾼 노릇도 했다.
하찮은 직업을 전전하다가 그의 건강이 약해지자 그는 1859년 어머니와 살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왔다.
당시 사우스 샌프란시스코는 농장이었는데 그는 여기서 농사일을 하면서 건강을 회복했다.
1860년 2월 그는 몇 번 간질 발작을 하더니 3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부검은 실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정확히 그의 두뇌 어떤 부위가 손상당했는지 규명하기 위해 1866년 그의 시체가 정식으로 발굴되었다.
연구가 끝난 후 그의 두개골과 쇠막대기는 하버드 대학 박물관에 기증되어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
게이지가 입은 상처로 보아 두뇌에서 전두엽(前頭葉, Frontal lobe)은 사회적 환경에서 주위를 참작하여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관할하며 성격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 후로 사고로 인해 전두엽을 다친 환자들을 관찰해 보았더니 게이지의 성격 변화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심한 성격 변화를 보였으며 일정한 직업을 갖지 못했고 사회 규범을 존중하지 않았다.
또 계획을 세우고 절차를 따라 시행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한편 예일대학에서는 두 명의 연구원이 성질이 사나운 침팬지 두 마리를 대상으로 전두엽을 파괴하는 실험을 해 보았다.
그들은 더 이상 난폭하지 않았다.
1935년 이들 연구원들은 한 학회에서 자신들의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그 결과 여러 정신과 의사들이 정신병 환자들에게 전두엽 절제술을 광범위하게 실시했다.
그들 중의 하나가 포르투갈 의사인 에가즈 모니즈였는데 그는 그로 인해 1949년 노벨 의학상까지 수상했다.
(그는 정계에서도 활약하여 1917년에 포르투갈 외무상이 되었으며 다음 해 파리 강화조약에 자국 대표로 참석한 바 있다.
)
그러나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신병을 치료하는 약물이 의약계에 등장하게 되면서 전두엽 절제술은 비인도적인 치료로 간주되어 정신병 치료 방법에서 신속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도 피니어스는 전두엽의 역할을 의학계에 처음으로 알려준 큰 공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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