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인터뷰]워싱턴 페더럴 웨이 시티(Federal Way City) 박영민 시장
대담=이기준 <본보 논설주간>“동포사회 주류는 아직까지 1세들이다.
이들의 의식변화가 시급하다!”
워싱턴 주 페더럴 웨이 시티(Federal Way City) ‘박영민(Michael Park)’시장.
그는 우리 동포사회 입지전적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통하고 있다.
30세가 지나 이민을 왔지만 시 의원이 됐을 뿐 아니라 지난 2000년 시장에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이민 1세로서 시 의원에 당선된 경우는 뉴저지 주 레오니아 시의 최용식씨를 비롯해서 전국적으로 8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시장에까지 오른 경우는 그가 최초다.
이민역사가 40여 년에 이르는 시카고 동포사회가 아직 시 의원 한 사람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시기에 그의 내방은 좋은 자극제가 될 것이다.
한인발전협의회(회장 조찬조)와 강원도민회 등 초청으로 시카고에 와 강연회를 가진 박 시장을 만나봤다.
▶Federal Way시를 간단히 소개한다면.
-시애틀과 타코마 사이에 위치해 있다.
현재 인구는 8만7천여 명으로 워싱턴주에서는 7번째 도시다.
세계 제일의 목재회사 Weyerhauser가 있어 건축·펄프·해운 등의 중심이 되고 있다.
World Vision 본부도 위치해 있다.
우리 동포 수는 1만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언제, 어떤 계기로 정계에 입문하게 됐나.
-1994년 12월 절친하게 지냈던 Bob Stead시장이 King County 법원 판사로 영전, 공석이 된 시 의원 한 자리를 내게 권유했다(시의원은 시장 포함 7명). 그래서 며칠 고민하다가 도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총 26명이 지원했는 데 이듬해 1월 인터뷰에서 불합격됐다.
내가 유일한 동양인으로 인종의 벽을 실감했다.
불같은 투지가 일어 그 해 3월 선거운동에 나섰는데 의원 1명이 검찰에 입건되자 사표를 내 공석이 됐다.
그래서 6월6일 7개월간의 임명직에 당선됐다.
▶95년 말 선거에서 다시 선출됐는 데.
-그 해 말 상공회의소 소장이었던 Greg Powers 씨와 맞붙게 됐다.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백인들 사회에서 교육청 봉사활동 등 학부모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많이 해 충분한 점수를 따두어 겨뤄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당시 인구 7만5천여 명에 3만8천여 명의 유권자중 54%를 얻어 당선됐다.
▶우리 동포들의 투표율은 어느 정도였나.
-당시 7천여명의 동포 중 유권자는 1천500명 정도로 분석됐다.
그러나 막상 투표해준 동포는 불과 100명 정도였다.
“한국인이 미국인 사회에서 투표해 얻는게 뭐냐”고 하는 데 크게 당황했다.
적극적인 동포 계몽에 나서게 된 동기가 됐다.
▶선거운동 중 어려움은 없었는지.
-투표일 사흘 전 유력 신문 ‘Federal Way Mirrow’에 “우리의 시정(市政)활동에 왜 동양인을 뽑아야 하느냐? 더구나 한국인은 각종 활동에 거의 참여치 않는다.
”라는 내용의 독자 투고가 크게 실렸다.
내 인생 중 가장 큰 고비자 위기로 내심 크게 위축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다시 독자 투고가 게재됐다.
내용은 “우리 시정활동에 동양인이면 어떠냐. 우리의 권익을 위해 헌신해주기만 하면 되지 않으냐”는 내용이었다.
선거 분위기가 크게 전환됐고 여기에 용기백배할 수 있었다.
▶2000년 처음 시장에 당선됐는 데.
-시의원이 되고 나서 지역주민들의 공익에 최우선을 두고 봉사했다.
공공안전분과위원장을 맡아 가가호호(家家戶戶)의 일들을 내 일처럼 관심을 가지고 헌신했다고 자부한다.
이러한 활동이 시민 개개인에게 크게 어필했다고 본다.
나름대로 숫자에 밝아 재정분과위원장이 돼 1998년 부시장, 그리고 2000년 시장으로 오를 수 있었다고 본다.
▶시장으로서의 시 의정활동은.
-매달 1·3주 화요일 시 의정을 위한 의회를 주재한다.
국제·외무·재정·교통·교육·치안·문화를 비롯한 모든 안건들을 협의하고 처리한다.
이 외에 분과별 위원회 미팅이 있다.
▶시 의정활동 중 보람있는 일이나 성과를 든다면
-우선 자체경찰 창립과 시 법원을 조직토록 해 예산을 크게 절감하고 동포 경찰관을 채용한 것을 들 수 있다.
지난 1990년대 초 자체 경찰이 없어 인근 King County경찰의 치안협조를 받고 있었는데 54명 파견에 연간 500만 달러를 지불했다.
그런데 해마다 인상되더니 95년에는 800만 달러를 요구했다.
너무 부담이 커 계약을 파기하고 이듬 해 96년 1월 경찰서장 인선과 함께 자체경찰 조직에 나섰다.
처음 75명으로 조직하면서 10%의 한인을 채용해줄 것을 요구했다.
현재 170명의 경찰조직중 부서장 앤디 황을 비롯해 동포 경찰 8명이 근무중이다.
경찰 1인당 인건비가 연 7만5천 달러 정도니 막대한 예산 절감이 아닌가. 법원은 지난 2001년 조직했다.
판사 2명 서기를 비롯해 총 18명으로 구성됐다.
이로써 King County법원에 의존하던 각종 민형사 사건 처리를 자체해결토록 했다.
우리 동포 상록회에도 그랜트로 2만5천달러씩 지원토록 하고 있다.
▶그 외 우리 동포와 관계는.
-‘City&Korean Community Leader Meeting’을 만들었다.
정기적으로 시 관계자와 우리 동포 대표들이 모여서 시정에 대한 설명회를 갖고 있다.
우리 동포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건의사항을 검토, 수용하기도 한다.
아주 바람직한 정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 2000년 고국의 동해시와 자매결연을 맺어 해마다 교차 방문을 통해 사회·문화·행정 등 우호관계를 수립하고 있다.
이곳 주류인사들을 많이 데려갈수록 친한파(親韓派)를 확대하는 데 아주 그만이다.
▶동포 정계 진출 확대는 시급한 문제인데.
-인식의 전환이 시급하다.
아직은 동포사회 주류가 이민 1세들이다.
이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류 사회에 보다 더 융화해서 이 땅에 뿌리를 이루어야 한다.
미주 지역 대부분 단체 인사들이 한국에서 정치인이 오기만 하면 환대에 정신 못차리고 기회만 나면 한국에 가서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것은 큰 문제다.
▶주류사회에 어떻게 융화해야 하는가.
-우리 동포들에 대한 주류사회 인사들의 불만은 하나같이 참여의식 결여였다.
예로 교육청 학부모 회의나 시 공청회 등에서 한인들은 아예 참석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우리처럼 처음에 영어 소통이 미약한 우크라이나나 남미인들은 통역을 대동하고 참여하고 있을 정도다.
이래야 소수의견도 제대로 반영될 것 아닌가. 그 외 봉사활동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세탁협회장 때부터 주류사회 봉사활동에는 무조건 참석해 지역주민들에게 나라는 존재를 각인시켰다.
속된 말로 ‘몸으로 때운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선거 전 나를 음해했던 투고에 맞서 옹호하는 투고를 보낸 인사도 이 지역 주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동포의 적극 지원도 불가결할 것으로 보는 데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역시 참여도인 데 유권자들에 대한 정보가 시급하다.
그래서 동포 유권자들의 선거인 등록부를 만들었다.
현재 각 지역별로 모두 합하면 4천~5천여 명 등록돼 있다.
앞으로 선거 때마다 이들의 결집력은 대단해질 것이다.
이 정도면 주류사회 정치인들도 우리 동포들의 집회에 나오지 말라고 해도 나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주류 정치인에 대한 후원도 방법 중 하나인가
-주류 정치인들은 “한인들의 후원금은 가장 부담이 없다”고 웃을 정도다.
“후원금을 받고 같이 사진만 찍어주면 그만”이라고 한다.
다른 인종 단체들은 후원금을 전달하며 어떻게 쓰이는지, 또 자신들 커뮤니티 차원의 요구사항도 아주 당당하게 제기한다는 사실이다.
법을 어겨서는 안되지만 법의 유연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도 소수민족이 깨우쳐야 할 요소다.
우리 동포들이 크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시카고 동포사회에 바라고 싶은 점은
-이민 1세들이 주류 사회에 대한 참여 의식을 보다 강화해야 한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땅이기 때문이다.
‘울지 않는 애는 젖을 주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주류사회와 거리가 있는 만큼 2세들과도 너무 단절돼 있다.
오죽하면 ‘육지 속의 섬’이라고 하겠는가. 앞서도 말했지만 동포 1세들이 주류가 돼 2세들을 잘 이끌어야 한다.
그래야 단절을 예방하고 코리안 커뮤니티의 위상을 확실히 제고할 수 있다.
‘혼자 꾸는 꿈은 꿈이지만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박영민 시장은
1946년 강원도 원주 출생
1976년 미국 이민
1989년 워싱턴주 한인세탁협회장
1992년 시애틀 한인회 이사장
1993년 페더럴 웨이시 공공안전위원회 부의장
1994년 워싱턴 주지사 자문위원
1995년 페더럴 웨이 시 의원
1998년 페더럴 웨이 시 부시장
2000년 페더럴 웨이 시 시장
2006년 페더러 웨이 시장 재선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