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캠피온 파트리스 레꽁뜨 등 뛰어난 여자 감독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자가 영화감독이라고 하면 '여류'라는 형용사를 앞에 붙이는 것은 우리들 사고방식의 오랜 관습에 기인할 것이다. 남성들이 아무리 도시락 싸 가지고 다니며 머리 쥐나도록 고민을 할지라도 끌어낼 수 없는 인간 깊숙한 내면 감성을 여류 감독들은 그 섬세하고 독특한 감각으로 그려낸다.
엄마의 무비카메라에 잡힌 아들 이서준군의 모습. 영화의 한 장면이 따로 없다.
홍콩 감독 왕가위의 '중경삼림'을 보고 감동 이상의 전율을 느꼈던 안유진(29)씨는 아주 어린 나이에 이미 영화감독이 되기로 마음먹었고 그 꿈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대학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다. 졸업반 때는 COX 방송국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미국 방송국의 실무를 가까이서 체험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 공부하랴 데이트하랴 몸이 열 개라도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 바쁜 나날 가운데 그녀는 무비카메라를 메고 다니며 눈앞에 펼쳐지는 독특한 세계들을 필름에 옮겼다. 6~10분짜리 단편 영화들이지만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친구들과 가족들은 그녀의 나이답지 않은 비범한 감각과 세상을 보는 따뜻한 시각에 감탄하곤 했다.
"단편 영화 만드는 습작기간을 통해 언젠가 2시간 길이의 제대로 된 아트 영화를 만들 날을 생각할 때면 가슴이 파르르 떨려오곤 했어요." 꿈 많던 대학 시절을 회상하는 그녀에겐 아직도 뜨거운 열정이 가득 느껴진다.
"시간 날 때면 극장 수가 많은 영화관을 찾아 두 세 편 정도의 영화를 몰아보면서 요즘 감독들의 드라마 만드는 솜씨를 감상하기도 했죠. 오렌지 시에 AMC 극장은 30개의 화면에서 다양한 영화를 선택할 수 있어 자주 찾았던 곳이에요."
결혼은 한 여자의 삶에 있어 버팀목과도 같은 꿈에 수정작업을 가하게 될 만큼 커다란 사건이기도 하다.
그녀는 대학 시절 곁에서 촬영부터 편집까지 묵묵하게 일을 거들어주던 남자친구 이창원(29.UCI Biomedical Engineering 박사과정)씨와 2004년 겨울 웨딩마치를 울렸다. 초등학교 동창으로부터 시작된 그들의 질긴 인연은 친구처럼 연인처럼 알콩달콩 살아가는 부부의 연으로 열매를 맺었다.
첫아이를 출산하면서 그녀는 스스로가 '삶'이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임을 깨닫는다. 올해 2월 첫아들 이서준 군이 태어남과 함께 그녀는 무비카메라를 꺼내 들고 촬영을 시작했다.
방긋 웃는 아이의 모습 옹알이를 시작하는 순간 가만히 누워만 있던 아이가 처음 뒤집기에 성공하던 날 그 작은 입술을 움직이며 '엄마'라는 한 마디를 공명에 싣던 날의 감동을 그녀는 모두 무비카메라에 담아두었다. 앞으로 서준이가 기어 다니기를 시작하던 순간 처음 발걸음 내딛으며 걸음마를 시작하는 감격적인 날도 그녀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서준이가 잠자리에 들어 조용한 밤 드디어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그녀는 아이의 동영상 비디오를 들여다보며 편집을 시작한다. 영상에 어울리는 음악을 골라 넣고 자막도 넣으니 세상에 이보다 감동적인 드라마가 또 있을까 싶다.
"영화감독에의 꿈을 접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아기가 성장해가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엮어 한 편의 영화로 만드는 작업은 극장에서 상영되는 흥행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이거든요. 아기를 보고 살림 하느라 바쁜 하루를 보낸 뒤 밤에 또 다시 편집기 앞에 앉아도 피곤한 줄 모르는 것은 삶의 순간들이 한 편의 영화로 탄생되는 것에 대해 느끼는 기쁨과 행복이 너무 크기 때문일 거예요."
아기의 동영상을 찍고 편집하며 가슴에 차오는 행복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감독상을 받는 것보다 결코 작지 않음을 그녀의 밝은 미소와 편안한 존재감은 증명해주고 있었다.
안유진씨는 아기의 성장 영화나 가족 대소사의 기록 영화를 멋지고 남기고 싶은 독자들이 문의해 오면 기꺼이 답해줄 것을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