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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사' 최요삼의 짧은 인생, 권투만 알던 청년···천상의 챔프 되다

Los Angeles

2008.01.02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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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밤(한국시간) 뇌사 판정을 받은 최요삼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그의 조카 어린이들이 눈물 속에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박종근 기자

2일 밤(한국시간) 뇌사 판정을 받은 최요삼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그의 조카 어린이들이 눈물 속에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박종근 기자

‘투혼의 복서’가 냉정한 사각의 링을 떠나 평생의 안식처로 갔다. 육신은 떠났지만 자신의 장기를 모두 기증하며 6명에게 새 생명을 불어 넣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최요삼은 지난 73년 10월16일 전북 정읍에서 아버지 최성옥과 어머니 오순이(65)씨의 4남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자식들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아버지는 노량진에서 건강원을 운영하며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의지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노량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86년 영등포 중학교에 입학한 최요삼은 1학년 때 선배 복싱 경기를 응원하러 갔다가 운명적으로 복서의 길로 접어 들었다.

용산공고를 졸업한 최요삼은 93년 라이트플라이급 신인왕을 시작으로 95년 한국챔피언 96년 동양챔피언에 등극했다. 99년 10월17일 최요삼은 태국의 복싱영웅 사만 소루자투롱을 판정으로 꺾고 세계복싱평의회(W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에 올랐다.

턱뼈가 부서지는 가운데에서도 힘들게 챔피언에 올랐지만 세상은 최요삼에게 장미빛 인생보다는 큰 시련을 안겨줬다.

외환위기로 스폰서를 구하지 못한 최요삼은 3년간 방어전을 간신히 네차례 치렀을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복싱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지니고 있었던 최요삼은 '복싱은 배고프고 무식한 사람이 하는 운동'이라는 인식을 잠재우기 위해 나주대학교 스포츠레저학과를 졸업했다. 평소 독서와 사업에도 관심이 많았던 최요삼은 경기대학원 최고 경영자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열기가 채 식지 않았던 2002년 7월4일.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관중들의 응원속에서 최요삼은 정면 대결을 선택했고 결국 호르헤 아르세(29.멕시코)에게 6회 TKO패를 당하며 챔피언 벨트를 빼앗겼다.

최요삼은 이후 2003년(WBA라이트플라이급.베비스 멘도사)과 2004년(WBA플라이급.로젠도 파라)에 잇따라 세계 정상 도전에 실패하며 쓴맛을 봤다.

주위에서 나이도 있고 더이상 '복싱으로는 밥먹고 살기 힘들다'며 이직과 은퇴를 권했지만 최요삼은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2003년 12월 동대문 밀레오레 홍보실 직원으로 채용된 최요삼은 낮에는 상인들을 위한 홍보 업무를 밤에는 도장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펼쳤다.

주경야독을 하던 최요삼은 구인회 밀리오레 발전위원회 위원장의 배려로 월급만 받고 복싱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다. 최요삼은 힘들고 지칠 때마다 지인들을 떠올리며 다시 글러브를 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2006년 12월 재기전부터 연승 행진을 벌인 끝에 지난해 9월 세계복싱기구(WBO) 플라이급 인터콘티넨탈 챔피언에 올랐다. 오는 4월 미국에서 세계챔피언이 된 뒤 명예롭게 은퇴하고 나면 '선수들을 위하는 프로모터가 되겠다'는 게 꿈이었다.

96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형제들은 앞가림하기에 바뻤고 어머니와 동생의 뒷바라지는 결국 최요삼의 몫이었다. 어머니와 동생에게는 남편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최요삼은 마음놓고 먹고 싶은 것 먹지도 못하면서 링위에서 피땀흘려 번 돈으로 지난해 안양에 32평형 아파트를 어머니에게 선물했다. 동생에게는 훌륭한 골프선수가 되라며 3년간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등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지난해는 동생에게 결혼하려면 집이 있어야 한다며 의정부에 37평형 아파트도 사줬다. 정작 자신은 집 한채도 없으면서도 어머니와 동생을 먼저 생각했다.

자신은 언제든지 큰 돈을 벌 수 있다며 큰소리 쳤지만 최요삼은 힘든 싸움을 펼치며 모진 세파로부터 묵묵히 어머니와 동생의 바람막이가 됐다.

1차방어전이 열렸던 12월25일. 평소 경기를 앞두고 라커룸에서 장난을 치던 최요삼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링에 올라가기 전 동생에게 '이상하게 긴장이 안된다'고 말한 것이 마지막 남긴 말이었다.

더 이상 환하게 웃는 최요삼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우리들의 가슴속에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아름다운 청년 진정한 챔피언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어머니 '제사 지내줄 피붙이 없어' 남편 기일에 맞춰 호흡기 떼

서른 다섯 일생을 마감하고 하늘로 올라가는 최요삼의 앞길은 외롭지 않았다.

의식불명 상태에서 여드레간 사투를 벌이다 결국 뇌사판정을 받지만 자신의 몸은 여섯 사람의 생명과 함께 숨을 쉬게 된다.

더구나 이승을 떠나는 음력 11월 24일인 1월 2일은 먼저 가신 아버지의 기일. 기일에 맞춰 이승을 찾아온 아버지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저 세상에서나마 그리던 아버지를 만나게 됐으니 좋은 의미로 여길 수 있겠으나 남겨진 가족들에게야 이런 기구한 운명이 또 있을까.

한 가정의 가장을 떠나보낸 날이 아들의 기일이 됐으니 자식 앞세운 것도 모자라 같은 날 두 남자를 보낸 최요삼의 어머니의 고통은 충분히 헤아릴 만하다. 최요삼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가장이나 다름 없었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최요삼의 어머니는 이왕 마음의 준비를 한 이상 하늘의 뜻이라면 아버지와 같은 날 아들을 보내기로 했다. 결혼을 하지 않아 피붙이가 없는 최요삼의 제사를 함께 치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상 사망 시각이 될 장기기증 수술 시간도 3일 0시(한국시간, LA 시간 오전 7시) 이후로 요청했다. 통상 세상을 뜬 전날을 기일로 삼아 밤 12시 이후 제사를 지내는 관례에 따른 것이다.

한국권투위원회(KBC)는 최요삼의 장례를 한국시간으로 5일 권투인장으로 치른다. 지난 1982년 역시 뇌사로 숨진 김득구 이후 두 번째 권투인장이다.

문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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