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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상의 사랑방] 이완용을 찌른 이재명

San Francisco

2008.02.0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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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미주한인 이민 100년사-

이재명(李在明 1890∼1910) 의사는 미주 이민사와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 일명 수길(秀吉)로 불려지던 그는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1903년,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며 1904년에는 하와이 이민 모집에 응모하여 하와이로 건너와 수년간 노동을 했다.

한국에서는 1904년 2월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협약서이 강제로 체결됐다.
그 해 11월, 제2차 한일 협약서가 체결되면서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재명은 1907년 10월 항일운동을 하려고 귀국했다.
1908년,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저격사건 소식을 들었다.
이 사건이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1909년 1월,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순종의 평양 순행 소식을 듣고는 동지들과 이토를 죽이려고 평양역에서 대기했다.
그러나 안창호의 만류로 단념했다.
그 해 10월 이토는 만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에 의해 암살 당했다.
이재명은 이동수, 김병록, 김정익 등과 매국노들을 죽이기로 공모했다.
제일 목표가 을사 오적인 이완용이었다.
이완용은 처음에는 미국통이었다.
1887년, 주차미국참찬관으로 미국에 왔다가 이듬해 5월 귀국했다.
다시 12월 미국에서 근무하고 1890년, 귀국했다.
그 뒤 친러시아파가 되었다가 다시 친일파로 변신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주역으로 공을 세우고 한일합방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 지위를 받았다.
다시 후작, 중추원 고문과 부의장이 되었다.
이재명으로부터 암살 미수를 당하자 더욱 강경해졌으며 친일 행세를 했다.
3.1운동에 대하여 세 차례나‘경고문’을 발표했다.
일인보다도 더 악독한 매국노였다.

이재명은 1909년 12월22일 서울 종현성당(현 명동)에서 벨기에 황제 리오올드 2세 추도식이 있으며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거사 전날 그는 당시 영심여학교 학생이던 아내 오인성을 숙소로 불러 마지막 작별의 밤을 보냈다.
그녀는 울지 않았고 거사를 말리지도 않았다.
날이 새자 이재명은 이동수, 김병록과 같이 성당으로 향했다.
군밤장수를 가장했다는 자료도 있고 학생복을 입었다는 자료도 있다.
전신주 뒤에 몸을 감추고 기다리니 오전 11시 30분에 이완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재빨리 인력거에 올라타자 이재명이 달려가 인력거 뒤로 올라타면서 칼로 왼쪽 어깨를 힘차게 찔렀다.
이완용은 실신하면서 인력거 밑으로 나둥그러졌다.
인력거 차부인 박원문이 덤벼들다가 칼에 맞고 주인 옆에 쓰러지면서 그는 숨을 거두었다.
이완용을 올라타고 여러 번 찔렀다.
자신의 두루마기에 가려져 이완용을 거꾸로 올라탄 사실을 모르고 가슴인줄 알고 엉덩이를 계속 찌른 것이었다.
달려온 경관들에 의해 체포되면서도 자신의 거사가 성공한 줄 알고 ‘대한 만세’를 연창 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동수와 김병록도 이완용이 죽은 것으로 속단하고 현장에서 떠났다.
안중근 의사에 비해 나이가 어린 이재명은 중요한 순간 침착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완용은 어깨, 허리, 복부 등 세 곳을 찔렸으나 약 2개월 동안 치료받고 회복되었다.
1910년 4월 13일부터 서울지방 법원에서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법정에 선 이재명은“나라를 위한 죽음은 내 평생 소원이니 조금도 두렵지 않다.
그러나 이 일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수 천명의 이재명이 나타날 것이다.
한 알의 곡식이 땅에 떨어져 수천 배의 곡식을 낳을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제도 늦지 않았다.
통감부를 철폐하고 5조약과 7조약을 무효화하고 빼앗은 대한의 주권을 남김없이 우리에게 되돌려 달라. 그러면 뒷날 일본에 닥치게 될 큰 화를 면하게 될 것이다.
”혈기 어린 이재명은 초지일관 당당했다.
재판정과 일본을 통렬히 꾸짖었다.
그러면서 뒤로 돌아 아내와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아내 오인성도 매국노를 죽여야지 우리 남편을 죽이느냐고 소리쳤다.
방청객들은 일체 출입금지 시켰다.
선고 공판은 망국직전인 1910년 7월 14일이었다.
일제는 이완용 암살미수만으로는 사형을 면할 수 있던 이재명을 박원문 살인죄를 적용하여 사형에 처했다.
다른 연루자 11명은 최고 15년, 최하 5년 중형을 선고됐다.
그 해 9월 13일 이재명은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나이 20세였다.
원래는 권총을 준비했었으나 김구는 예사롭지 않은 청년의 눈매를 보고는 총을 빼앗아 보관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재명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소설가 박상우는 아름다운 열혈남아 이재명을 소재로 한‘칼’이라는 소설을 섰다.

매국을 한 적도 없고 할 수도 없는 인력거 박원문은 이재명의 다급한 칼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한국학을 전공하고 한국이름으로 바꾼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박노자 교수는‘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라는 글에서 한국의 독립과정 동안 테러와 의거로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을 나열하면서 박원명의 예도 들었다.
나라를 위한 과정에서 평민 하나쯤 죽는 것에는 고심한 흔적이 없는 당시 민족주의자들의 태도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한국을 사랑한 한 외국인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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