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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상륙작전서 사망한 최초의 한국계 군인

Los Angeles

2017.04.05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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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부쳐진 군인의 편지, 박존(상)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전쟁서 혁혁한 무공 세워

일주일에 두세번씩 편지보내
영어 못하는 어머니 걱정많아


제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전사한 존 박 상사에게 은성무공 훈 장이 추서됐다.

1944년 7월 13일 35보병사단 137보병대 G중대의 존 박 상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전사한 최초의 한국계 군인이다. 하와이 출신인 그는 당시 서른 한 살의 총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보여준 용맹함으로 그에게 은성 무공훈장과 퍼플하트훈장이 추서되었다.

"박 상사는 분대장으로 독일군 기관총을 측면에서 공격하다가 부상을 당했다. 적군이 있는 것을 알고 30미터를 포복하여 수류탄을 투척해 적군을 공격했다. 그때 멀리 있던 또 다른 독일군이 쏜 기관총에 맞고 중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상사는 자신의 분대로 돌아와서 분대원들을 재정비하고 중대장에게 정확하게 보고한 이후 자신의 상처를 치료받았다. 박 상사의 빈틈없는 상황 보고 덕분에 아군 중대가 적군 진지를 성공적으로 점령할 수 있었다. 박 상사의 용기, 부대원들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목적 달성을 위한 열성에 대해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동료들 모두 박 상사에게 깊은 감화를 받았다."

박 상사는 1914년 4월 25일 하와이 올라에서 출생했다. 부모님 모두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으며, 딸 넷과 아들 둘로 여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 자녀들 중 막내인 에스터 박은 연방정부에서 30년 동안 근무하고 은퇴한 후 현재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했다. 에스터는 미군 부대에서 민간인의 신분으로 오랫동안 근무했다.

1987년에 에스터와 인터뷰를 가졌다. 오빠인 존 박 상사가 전사한 지 50년이 훌쩍 넘은 때였다. 중국계 남편 랠프와 거실에 앉아 에스터는 당시를 회상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전쟁터에서 오빠가 보낸 편지 꾸러미를 들춰보며 그녀는 존 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존은 일주일에 두세 번씩 집으로 편지를 보냈으며, 가족들로부터 답장을 받고 싶어했다. 오빠는 집이 무척 그립다고 했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답장을 써서 오빠에게 보냈다. 우리 가족은 서로 매우 각별했다. 나는 막내였다. 어머니는 첫 번째 남편과 그 사이에서 낳은 어린 딸 조세핀과 함께 하와이로 이주했는데, 그 남편은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그후 어머니는 우리 아버지인 박성군과 재혼했다. 아버지는 하와이 올라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러 왔다. 아버지와 우리 형제자매들은 올라의 하카라우 한국인 캠프의 매니저로 일했고, 어머니는 캠프 식당에서 일했다. 나는 아버지가 전신마비가 되던 날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우리 집에는 더운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매일 물을 끓여야 했다. 그날도 아버지는 물을 끓이기 위해 무릎을 꿇고 불을 피우려다 갑자기 일어나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때가 1933년이었고 나는 3학년이었다.

아버지는 6년 동안 병원에 다니며 한쪽 다리를 겨우 끌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을 때 비로소 퇴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거동이 매우 불편했고 끝내 1939년 세상을 떠났다. 오빠 존, 조셉과 나는 학교에 다녔고, 언니 메리는 일을 했으며 다른 두 언니들은 결혼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존은 영어를 잘 못하는 어머니를 보호하고 챙기는 일을 도맡아 했다. 존은 편지에서 항상 어머니를 잘 챙기라는 당부의 말을 보탰다. 또한 어머니날에는 꽃을 꼭 사드리라고 하는 등 조그만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 썼다. 그때 나는 호놀룰루의 히캄 공군기지에서 일하고 있었다. 오빠는 자신이 한국계라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는데, 특히 본토에 있을 때면 그 자긍심이 더 강했다. 물론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우리가 한국계인지 일본계인지 제대로 구분을 못했는데, 만일 자신이 일본계로 오인되기라도 하면 그에 대해 무척 화를 냈다.

오빠가 전사한 후 시신이 유럽에서 하와이로 옮겨졌는데, 오빠의 시신이 도착하던 날 하와이에는 비가 내렸다. 어머니는 그날 믿을 수 없다면서 오열했다. 우리 가족은 부두에 나오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수년 후에야 인정했다.

존은 하와이 대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언니 메리는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결혼을 할 수 없었다. 언니는 무려 세 개의 직장에서 일하면서 우리 가족을 돌보았다. 유치원 교사로 일하면서 오후에는 팔라마 지역 놀이터에서 디렉터로 일했고,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파인애플 통조림 공장에서 일했다. 그때 생계유지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열네 살밖에 되지 않은 나도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려고 지원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리다며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집요하게 계속 지원했다. 다행히 파인애플을 손질하는 일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가 되어 나는 마침내 취직할 수 있었다.

오빠와 평생 그곳에서 일한 어머니는 내가 일을 시작하자 매우 속상해했다. 어머니는 파인애플을 손질하는 일이 매우 고된 작업이라고 걱정했지만,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용돈이라도 벌어야 한다고 당당히 대답했다. 당시 나는 한 시간에 30센트를 벌었다. 1966년 어머니는 86세에 돌아가셨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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