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대 대통령 선거에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한 정주영 회장이 관훈클럽 특별회견장에서 정견을 발표하고 있다.<중앙포토>
-며느리를 볼 때 특별한 합격 기준이 있었나요.
"그런 것 없어요. 나는 회사 일이든 뭐든 치밀하게 관여하는데 아들들의 배우자에 대해서는 일절 관여를 안 합니다. 왜냐하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결혼이거든요. 따라서 부모가 선정해 줘서 피차 의견이 잘 안 맞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부모의 책임이 너무 크지 않겠어요? 그래서 '부부가 만나는 것은 운명이니까 너희 운명은 너희가 정하는 게 좋다.' 나는 자식들한테 늘 그렇게 얘기해 왔습니다.
나는 '인생의 세 가지는 운명이다'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첫째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거 이건 본인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입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어떤 집안 어떤 가정을 마음대로 선택해 태어나는 게 아니라 이미 운명적으로 정해진다는 거지요. 어린애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고 운명으로 되는 거다 그거지요.
둘째는 상대를 만나는 것이 운명입니다. 그 나라 그 사회에 수많은 결혼 적령기 남녀가 있는데 어떻게 거기에서 딱 하나를 골라 결혼하게 되는지 그게 다 만남의 운명이지요. 특히 운명이라는 것이 시간 아닙니까? 그 시간에 그 배우자가 나타나서 일테면 서로 좋아서 결혼하게 된다는 게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겁니까?
좋은 부부는 절대 인간의 힘으로 만나지는 게 아니라고 나는 말합니다. 그러니 너희가 정해 가지고 아버지는 인생 경험이 많으니까 아버지한테 이러저러한 여자인데 제가 결혼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는 양해만 구해라. 그러면 내가 참고할 얘기는 해주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우리 아들들은 전부 자기들이 찾아서 결혼했지 부모가 여자를 찾아서 결혼시킨 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세 가지 중 마지막은 죽어가는 거라고 생각하지요. 죽어가는 것은 자기 노력으로 못하는 거 아닙니까. 물론 자신이나 주변 사람의 노력으로 죽음을 지연시킬 수는 있지만 영원히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이겁니다. 지금 집사람(변중석 여사.작고)이 병석(집필 당시)에 누워 있는데 말도 없이 저렇게… 있는 걸 보면 내 마음이 말할 수 없는 심정이 되고. 어디 구경 가고 싶으냐 해도 말이 없고…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아 화 좀 내보라 해도 그냥 표정이 없고… 자기 친구가 부탁한다고 24평짜리 현대아파트 하나만 당첨되게 해달라고 할 때 왜 화를 내고 그걸 못해줬는지…
생각하면 참으로 내 자신이 원망스럽고 미안하고… 내가 아무리 도움이 되어 주고 싶어도 예전처럼 건강하게 해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쩌다 병에 걸려 죽고 좋지 않은 암에 걸린다거나 또는 자동차 사고로 죽는다거나 어떤 모양으로 죽든 그건 운명이니까 슬퍼하지 말자고 합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지만 자식의 죽음을 몇 번 봤습니다. 자식의 죽음을 보는 아비의 가슴보다 더 아픈 일은 이 세상에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건 아비도 막을 수 없는 자식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뜻이고 인명은 재천이다. 모든 게 운명이니까 어떤 죽음이 선택되더라도 슬퍼하지 말자' 그렇게 말하고 또 내 자신이 그렇게 소화해 왔습니다." (여기서 정 명예회장은 잠시 눈빛을 내리고 소파의 팔걸이를 자꾸 만지작거렸다.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마도 솟구치는 회한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들들이 여자를 선택해 오면 회장님께서는 꼭 말씀을 해주신다던데 내용이 무엇입니까?
"나는 그 여자의 학벌이나 가문은 보지 않아요. 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더 사귀어 보라고 합니다. 피차 장단점을 깊이 알고 나서 결혼해야 한다는 걸 강조합니다. 후회 없도록 하기 위해 더 사귀어 보라고 하는 거지요. 그래서 몇 달 사귀고 나서 결혼하겠다고 하면 '안 된다 더 사귀어 봐라'고 해서 우리 아이들은 거의 다 1년 이상이나 끌었지요. 서로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그렇게 해서 다 결혼했는데 아직 우리 집안 애들은 파경이 하나도 없습니다. 본인들이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하고 또 부모가 신중을 기하라고 권한 것이 옳았다고 생각하지요. 부모 말 잘 들어 손해 보는 자식 없어요. 그렇게 하고 내 말을 안 들으면 안 도와주는 거지 뭐 지가 무슨 수로 큰 회사 회장이 돼요. 하하항…."
-깊이 사귀어 보라고 하는 동안에 여자가 바뀐 경우도 있습니까?
"있죠. 좋다고 결혼하겠다는 걸 안 된다 잘 사귀어 보라고 하는 동안에 (바뀐 경우가) 한 두번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부가 되지 않은 여자는 그 여자도 불행을 막은 셈이지요."
-그 여자는 재벌가 며느리가 안 된 것이 오히려 불행하다고 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철없는 여자라면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몇째가 그랬습니까.
"녹음기 끄면 내가 얘기하지요 하하하. (끄겠다고 했더니 '우리 ○○ 회장이 알면 괴로워할 거 아니야. 며느리도 괜히 좋은 마음 안 생기고. 그래서 과거는 아무 쓸모가 없어'라고 했다. 그러곤 약속을 했다.) 인연이 안 되려니까. 나는 괜찮아 보이는데 성사가 안 된 적도 있지요. 다 운명이지요.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여자를 선택한 뒤 장단점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더 사귀라는 것이니까 서두르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애들 엄마는 마음이 여려서 그런지 애들이 여자를 데리고 오면 손도 잡아주고 등도 토닥거려 주고 해서 내가 어떨 땐 한소리 하지요. 그렇게 하면 그 여자애가 며느리가 되는 줄 알고 혼동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나만 인기 떨어지고 하하하."
-안 된다고 하신 것은 관상적으로나 회장님께서 보시기에 마땅치 않아서였습니까.
"나는 관상 같은 거 볼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엉덩이가 크면 좋다고 그래요 하하하. 사실 내가 어릴 적에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지요. 엉덩이가 커야 자식을 수월하게 낳을 수 있다고. 엉덩이가 작으면 듬직해 보이지 않지요. 남자가 큰일을 하는데 집안을 꾸려야 하는 여자가 가볍게 쏘다니면 안 되잖아요. 엉덩이가 가벼우면 발딱발딱 일어날 거 아니에요 하하항. 사고 내서 신문에도 나고 대통령한테 불려가서 혼이 난 회장 높은 양반들을 보면 다 부인들이 엉덩이가 작더래 하하하항!"
-세 가지 운명론은 새로 인생을 출발하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지침이 될 수 있겠는데. 주례를 서본 일이 있으십니까?
"결혼식 주례는 평생 한 번도 안 섰습니다. 나는 거짓말과 위선을 제일 싫어합니다. 나는 30대에 내 아내 아닌 다른 여자도 좋다고 생각해본 일이 있기 때문에 주례를 선다는 것은 위선이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래서 (평생) 주례를 한 번도 안 섰습니다. 자기가 표본이 될 만해 가지고 주례를 서야지 과거 30대에 탈선했던 사람이 무슨 주례를 서느냐 싶어 자책감 때문에 주례를 안 섭니다. 그건 위선이고 전도양양한 젊은 사람 앞에서 주례는 안 되지요. 주례는 성직자나 아주 고결한 스승이나 그런 사람이 서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중요하고 신성한 결혼식에 더구나 많은 하객 앞에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바탕으로 교훈이 될 수 있는 얘기를 해주어야 하는데 사회적으로 이름이 좀 있다고 해서 아니면 직위가 좀 높다고 해서 젊은 사람 앞에 위선이나 거짓을 해선 절대 안 되는 거 아닙니까."